대한예수교 장로회
대복칼럼

그리스도인의 오지랖에 대하여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861회 작성일 2019-06-26 19:35
*** 그리스도인의 오지랖 ***
 
속담에
“오지랖이 넓다.”
는 말이 있습니다. ‘오지랖’은 상체에 입은 겉옷의 앞자락을 말합니다. 조선 초기까지는 저고리에 오지랖이 없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저고리라 부를 수도 없게 골반쯤까지 덮이는 길이라서 짧은 목욕가운처럼 허리끈을 둘러서 여몄습니다. 그러다가 저고리 길이가 점점 짧아져 허리 위로 올라오자 허리띠 대신 저고리 안팎에 속고름, (겉)고름을 달아서 그것을 묶어 여미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에서 보면 속이 다 들여다보이니 어쩔 수 없이 천을 한 치가량 덧댔습니다. 그 덧댄 부분이 오지랖입니다.
 
그런데 왜 이 오지랖 넓은 게 조롱거리가 됐겠습니까? 모양대로 말한다면 ‘오지랖이 넓다.’는 말은 “그래, 네 오지랖이 그리 넓어서 네 앞가림은 참 잘하겠다.”는 뜻입니다. 이 말이 ‘그래, 너 참 잘났다.’는 말로 ‘주제 모르고 아무 일에나 쓸데없이 참견한다.’의미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이 오지랖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도 표현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15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라고 했습니다. 이는 쓸데없는 일로 고난을 자초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21:15-17절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목양을 맡기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면서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베드로로서는 예수님의 이 물음이 무척 곤혹스러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며칠 전에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에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평소처럼 나서서 대담하게 대답하지를 못했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아주 낮은 마음으로 부드럽게 대답합니다. 이 물음과 답이 세 번씩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목양을 당부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앞날의 일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짧은 순간에 여러 생각이 교차했을 베드로는 자신에게 쏠린 관심을 돌리려고 했던지 옆에 있던 요한에게로 화두를 바꾸었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원래 오지랖이 넓었던 베드로가 마지막까지도 그 오지랖을 발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의 의도를 냉정하게 잘라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네 자신의 길에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의 일에 쓸데없는 관심 갖지 말고 네 자신에게 주어진 길에 마음을 두라.’는 것입니다.
 
오지랖 참견에는 ‘내가 너보다 더 잘 안다.’는 우월의식, 또는 ‘관심과 인정을 받고 싶은 인정욕구’라는 심리가 깔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월감이나 인정받기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을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13-14절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고 고백합니다. 즉 ‘다른 사람이나 다른 일에 간섭 하지 않고 주님이 주신 사명의 길만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게 주어진 길을 어떻게 가야 합니까?
 
남미 안데스 지방에 사는 키추아 원주민에게서 전래되는 이야기를 각색한 ‘츠지 신이치’의 ‘황금새 크리킨디 이야기’라는 글이 있습니다.
옛날 미국 남쪽 안데스지방의 아마존 숲에서 어느 봄날, 산불이 발생해 불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숲에 사는 여러 동물들은 불난리를 피해 앞 다투어 도망쳤지만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불길에 휘말려 불쌍하게 죽은 동물도 있었습니다. 숲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크리킨디’라는 이름의 벌새만은 주변의 호수로 왔다 갔다 하며 부리에 물을 한 모금씩 담아 와서는 산불에 떨어뜨리고 갑니다. 다른 동물들이 그 광경을 보고 저마다 벌새를 비웃었습니다.
“그런 일을 해서 도대체 뭐가 된다는 거야?”
크리킨디는 그 동물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야.”
카추아 원주민들은 이 이야기를 전래하면서 ‘이들은 환경이 어떠하든지 오직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한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이 사는 방식에 대하여 네가 상관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즉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하든, 환경이나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길에 충실하기를 원하십니다.
 
주께서 오십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Total 606건 11 페이지 RSS
대복칼럼 목록
No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456
내가 향하는 푯대
  • 늘푸른
  • 01-14
  • 1545
455
주님과의 동행
  • 늘푸른
  • 12-30
  • 1349
454
우리의 소망
  • 늘푸른
  • 12-23
  • 1378
453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해야 합니다.
  • 늘푸른
  • 12-04
  • 1802
452
가장 중요한 선택
  • 늘푸른
  • 11-24
  • 1987
451
분별해야 하는 시대
  • 늘푸른
  • 11-20
  • 1420
450
죽음의 늪
  • 늘푸른
  • 10-04
  • 2000
449
내가 책임져야 할 인생
  • 늘푸른
  • 09-04
  • 1694
448
마지막 때 그리스도인의 영성
  • 늘푸른
  • 08-20
  • 2133
447
영적인 의무
  • 늘푸른
  • 08-13
  • 1687
446
하나님께 소망을 둡시다.
  • 늘푸른
  • 08-05
  • 1613
445
자신과의 영적싸움
  • 늘푸른
  • 07-16
  • 2572
444
두려움과 기회
  • 늘푸른
  • 07-04
  • 1558
그리스도인의 오지랖에 대하여
  • 늘푸른
  • 06-26
  • 1862
442
주님과의 동행
  • 늘푸른
  • 06-18
  • 1572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