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소통
*** 하나님과의 소통 ***
세상 만물에는 모두 이름이 있습니다. 심지어 태풍이나 자연 현상에까지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무엇엔가 소속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누군가가 그것에 이름을 붙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에 소속이 되었다는 것은 그 무리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 무리의 일원이 되는 것에는 조건이 따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회사의 사원이 되려면, 먼저 그 회사가 제시하는 조건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저 자격만 갖추었다고 당장 사원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 회사와의 소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사원을 모집할 때면, 통상적으로 면접이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면접은 소통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도 분명한 자격이 있어야 하며, 소통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집을 새롭게 건축할 때, 전기 배선도 하고, 상수도와 하수도의 배관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집을 잘 지었다고 해서 바로 불이 켜지고, 인터넷이 연결되고, 물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전원을 공급하는 본선과 연결이 되어야 하고, 외부 상수도관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연결되는 것이, 소속이 되는 것이며, 소통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5절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포도나무와 가지는 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생존하려면, 줄기에 연결되어 있어서 뿌리로부터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라는 말씀에서, 하나님과의 소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소통(疏通)이란 나무뿌리에서 가지로 흐르듯이 ‘막힘없이 통한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생활 속에서 가끔 느끼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것 아시지요? 서로 약속한 것도 아닌데 마음이 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텔레파시(telepathy)라고도 하는 정신적인 소통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는 영적인 소통입니다. 이 영적인 소통을 주님께서는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이라고 표현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요한복음 15:9-10절을 봅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주님께서 우리가 주님과 소통하는 길이,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임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하는 소통이 없으면, 형식적인 신앙의 흉내를 내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교회가 이렇게 세속화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소통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사업을 경영하듯이, 자기 생각과 자기 뜻으로 교회를 경영하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한 종교 생활에 불과합니다. 종교 생활은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자기만족을 위한 행위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니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었다면 당연히 예수님을 알았을 것이며, 그 말씀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8:47절에서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과 소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 마라나-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