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답게 산다는 것
*** 사람 답게 산다는 것 ***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의식주와 생존과 번식 등. 이런 육체적인 삶이 사람다운 삶일까요? 그러나 이것은 짐승들이 사는 방식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짐승이나 다른 피조물에는 없는 특별한 생명을 사람에게 더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2:7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生氣)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되니라.”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에는 없는 “생기” 즉 ‘영’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사람이 잘 사고 사람답게 사는 길을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할 때, 진정한 생명과 삶의 의미가 있게 됩니다. 그 이유가 창세기 6:3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이 말씀에서 “육신”은 영어로 flesh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영(靈)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육체’ ‘몸’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육체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잘 사는 길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할 때, 비로소 완전한 존재가 되어 자신의 목적에 맞는 삶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할지라도 세상의 모든 만물을 보면 신의 능력을 느끼게 됩니다(롬 1:18-20).
이렇게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과정을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십니다. 방탕하고 고집스러운 둘째 아들은 자기 생각과 지식과 감정을 따라서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자신을 자유스럽고 행복하게 해 줄 파랑새가 세상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탄의 미혹에 빠져서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과 흡사합니다. 탕자는 아주 잠깐, 재물이 있는 동안은 그런 듯이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핑크빛 행복은 재물과 함께 사라져버렸고, 남은 것은 굶주림과 고독 그리고 생명의 위기뿐이었습니다. 탕자는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혔으며, 모든 것이 풍족한 아버지의 집이 그리웠습니다. 돌아가고 싶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진 고통과 생명의 위기가 탕자를 아버지 집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세상의 이치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세상에서 어려움과 고통, 생명의 위기를 만났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존재를 찾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 부족과 한계를 통하여 신적인 존재를 찾고 의지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떠나서는 사람다운 삶도, 잘 사는 길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께서 요한복음 15:10절과 12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인데, 그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사랑은 탕자를 받아두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면, 탕자가 자기 삶에서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온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즉각적인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 마라나-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