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4,109회
작성일
2003-06-21 21:09
♡♥♡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사람들은 왜 교회에 갈까?”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즈음 들어와서 속에서 꿈틀거리는 궁금증입니다. 왜 이런 시잘 데 없는 궁금증을 가지느냐고 묻고 싶으신 거죠?
“흠 …”
“저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어서랍니다. 이런 모습들은 목회자나 평신도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양새입니다. 아마도 십자가의 길만 따르기에는 지금 세상이 너무 현란하고, 쾌락을 모르는 채하기에는 아깝고, 삶이 아까운 것 같아서 일겁니다. 그래서 적당하게 신앙생활도 하고, 적당하게 세상을 즐기기도 하지요.
신앙생활은 좀 더 나이가 들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돈도 좀 모아놓고, 늙기 전에 조금은 즐기기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유명한 저술가이며 목사인 ‘척 스윈돌’의 글 속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진취적이고 성장이 빠른 컴퓨터 회사의 사장이 있었습니다. 소규모로 시작한 그의 회사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성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주식을 공모하기로 했습니다. 주식을 공모한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44세의 그는 첫 주식 공모로 하룻밤 사이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거부가 된 사장은 공모가 있은 다음 날 오후에 그 많은 재산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본사에서 겨우 한 구획 떨어진 곳에서 자가용을 운전하다가 6미터 높이의 보호 난간을 뚫고 계곡으로 떨어졌던 것입니다. 어느 신문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목요일 4시 30분의 사건이 있기까지, 그의 소형 컴퓨터 제조회사는 번성하고 있었다. 그 회사가 275만 주를 공모해서 얻은 순 이익은 3천 7백만 달러였다. 13달러였던 주가의 당일 상종가는 27달러였고 종가는 15달러 50센트였다. 그 사장 몫의 592,000주는 9백만 달러의 가치를 갖게 되었다.”
죽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이런 아까운 이야기가 또 하나 있습니다.
몇 해 전에 동역자 회에서 거제도로 여름 수양회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모임의 장소를 제공하고 모임을 준비한 거제도에 사는 회원이 사정이 있다면서 조금 늦었습니다. 그는 이웃 마을 초상집에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거제도뿐만 아니라 그 마을에서 처음으로 젊고 유망한 검사가 나왔습니다. 그는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임지로 가기 전에 해외 연수를 떠났습니다.
그날은 해외 연수를 떠났던 예비 검사가 임지로 가기 전에 고향에 들린 날이었습니다. 고향 마을에서는 마을 잔치가 열렸습니다. 잔치가 무르익은 오후에 그 젊고 유망한 예비검사가 갑자기 쓰러져서 의식을 잃었습니다. 부랴부랴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잔치집이 초상집이 되었습니다. 잔치를 위해 준비한 음식이 초상을 위한 음식이 되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생을 끝내기에는 너무나 아깝지 않습니까?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라고 탄식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저도 여러분도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조금 더, 조금 더, 라고 미루다가 어느 날 갑자기 기회는 사라지고 맙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서머나 교회는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이 감독으로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폴리갑과 함께 순교한 자들의 성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성화는 19세기 말 프랑스의 화가 레이몽 페레(Raymond Pere)가 그린 것인데, 순교의 현장에서 손이 묶어져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언제든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순교정신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후회를 남기지 않는 삶, 주님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한 삶은 매일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 안에서 말입니다.
오, 주님이여! 오시옵소서!
“사람들은 왜 교회에 갈까?”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즈음 들어와서 속에서 꿈틀거리는 궁금증입니다. 왜 이런 시잘 데 없는 궁금증을 가지느냐고 묻고 싶으신 거죠?
“흠 …”
“저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어서랍니다. 이런 모습들은 목회자나 평신도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양새입니다. 아마도 십자가의 길만 따르기에는 지금 세상이 너무 현란하고, 쾌락을 모르는 채하기에는 아깝고, 삶이 아까운 것 같아서 일겁니다. 그래서 적당하게 신앙생활도 하고, 적당하게 세상을 즐기기도 하지요.
신앙생활은 좀 더 나이가 들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돈도 좀 모아놓고, 늙기 전에 조금은 즐기기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유명한 저술가이며 목사인 ‘척 스윈돌’의 글 속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진취적이고 성장이 빠른 컴퓨터 회사의 사장이 있었습니다. 소규모로 시작한 그의 회사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성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주식을 공모하기로 했습니다. 주식을 공모한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44세의 그는 첫 주식 공모로 하룻밤 사이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거부가 된 사장은 공모가 있은 다음 날 오후에 그 많은 재산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본사에서 겨우 한 구획 떨어진 곳에서 자가용을 운전하다가 6미터 높이의 보호 난간을 뚫고 계곡으로 떨어졌던 것입니다. 어느 신문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목요일 4시 30분의 사건이 있기까지, 그의 소형 컴퓨터 제조회사는 번성하고 있었다. 그 회사가 275만 주를 공모해서 얻은 순 이익은 3천 7백만 달러였다. 13달러였던 주가의 당일 상종가는 27달러였고 종가는 15달러 50센트였다. 그 사장 몫의 592,000주는 9백만 달러의 가치를 갖게 되었다.”
죽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이런 아까운 이야기가 또 하나 있습니다.
몇 해 전에 동역자 회에서 거제도로 여름 수양회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모임의 장소를 제공하고 모임을 준비한 거제도에 사는 회원이 사정이 있다면서 조금 늦었습니다. 그는 이웃 마을 초상집에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거제도뿐만 아니라 그 마을에서 처음으로 젊고 유망한 검사가 나왔습니다. 그는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임지로 가기 전에 해외 연수를 떠났습니다.
그날은 해외 연수를 떠났던 예비 검사가 임지로 가기 전에 고향에 들린 날이었습니다. 고향 마을에서는 마을 잔치가 열렸습니다. 잔치가 무르익은 오후에 그 젊고 유망한 예비검사가 갑자기 쓰러져서 의식을 잃었습니다. 부랴부랴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잔치집이 초상집이 되었습니다. 잔치를 위해 준비한 음식이 초상을 위한 음식이 되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생을 끝내기에는 너무나 아깝지 않습니까?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라고 탄식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저도 여러분도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조금 더, 조금 더, 라고 미루다가 어느 날 갑자기 기회는 사라지고 맙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서머나 교회는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이 감독으로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폴리갑과 함께 순교한 자들의 성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성화는 19세기 말 프랑스의 화가 레이몽 페레(Raymond Pere)가 그린 것인데, 순교의 현장에서 손이 묶어져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언제든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순교정신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후회를 남기지 않는 삶, 주님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한 삶은 매일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 안에서 말입니다.
오, 주님이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