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눗셈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4,400회
작성일
2003-11-23 17:23
♡♥♡ 하나님의 나눗셈
신문에서 ‘광수 생각’이라는 연재만화 보신 적이 있지요? 이 짧은 연재만화로 유명한 만화작가가 된 ‘박광수’라는 분이 기독교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중학생 때 그는 3년 동안 어느 교회에 다녔는데, 어느 주일에 자신의 옷 중 가장 멋있다고 생각되는 '미즈노 회색 츄리닝'을 입고서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체육복 차림으로 어떻게 교회에 오느냐?”
며 나무랐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지금까지 그는 교회를 거부한다고 합니다. 그의 글을 직접 인용하겠습니다. 그의 수필집 ‘광수생각1집 73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딴에는 가장 신경을 쓴 옷이라 어린 마음에 상처를 심하게 받았고, 믿음에 형식이 먼저인지 마음이 먼저인지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는 지금 그 이후로 교회에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다.”
어떤 일로도 한 영혼을 실족하게 만든다면 주님의 경고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18:6)
하나님 앞에서의 내 모습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나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죄들을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모두 용서하시고 지워주십니다. 다시는 기억조차 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내 마음의 예복을 보십니다. 겉옷이야 좀 허름하고 보잘것없다고 해도 정성이 들어있으면 좋은 것입니다. 로마서2:11절에서,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러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 대하여는 얼마나 까다롭습니까?
자신을 대할 때는 관용, 즉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는 잣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 대하여는 엄격하고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댑니다. 이러한 자세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취할 자세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18:23절 이하의 ‘빚진 종의 비유’에서 이러한 사실을 비유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임금이 결산 회계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일만 달란트(6천만 데나리온/1데나리온은 장정하루의 품삯임)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빚진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 사람이 갚을 것이 없자 종들에게 그 사람의 처자와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갚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임금에게 사정했습니다. 임금은 불쌍히 여겨서 모든 빚을 없는 것으로 탕감해 주었습니다.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기분 좋게 가다가 자신에게 100데나리온을 빚진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친구의 멱살을 잡으며 빚을 갚으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친구는 사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빚진 친구를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본 다른 사람들이 임금에게 가서 다 말했습니다. 노발대발한 임금이 일만 달란트 빚졌던 사람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마18:33)
라고 하시며. 그 사람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비유는 ‘용서’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말할 수 없이 큰 은혜를 받은 성도가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지 못하는 옹졸함을 말씀합니다.
저나 여러분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고 나누어야 합니다. 이제는 자신에게만 너그럽고 다른 사람에게는 편협한 편견을 버리고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누어갑시다.
신문에서 ‘광수 생각’이라는 연재만화 보신 적이 있지요? 이 짧은 연재만화로 유명한 만화작가가 된 ‘박광수’라는 분이 기독교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중학생 때 그는 3년 동안 어느 교회에 다녔는데, 어느 주일에 자신의 옷 중 가장 멋있다고 생각되는 '미즈노 회색 츄리닝'을 입고서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체육복 차림으로 어떻게 교회에 오느냐?”
며 나무랐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지금까지 그는 교회를 거부한다고 합니다. 그의 글을 직접 인용하겠습니다. 그의 수필집 ‘광수생각1집 73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딴에는 가장 신경을 쓴 옷이라 어린 마음에 상처를 심하게 받았고, 믿음에 형식이 먼저인지 마음이 먼저인지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는 지금 그 이후로 교회에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다.”
어떤 일로도 한 영혼을 실족하게 만든다면 주님의 경고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18:6)
하나님 앞에서의 내 모습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나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죄들을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모두 용서하시고 지워주십니다. 다시는 기억조차 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내 마음의 예복을 보십니다. 겉옷이야 좀 허름하고 보잘것없다고 해도 정성이 들어있으면 좋은 것입니다. 로마서2:11절에서,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러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 대하여는 얼마나 까다롭습니까?
자신을 대할 때는 관용, 즉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는 잣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 대하여는 엄격하고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댑니다. 이러한 자세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취할 자세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18:23절 이하의 ‘빚진 종의 비유’에서 이러한 사실을 비유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임금이 결산 회계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일만 달란트(6천만 데나리온/1데나리온은 장정하루의 품삯임)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빚진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 사람이 갚을 것이 없자 종들에게 그 사람의 처자와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갚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임금에게 사정했습니다. 임금은 불쌍히 여겨서 모든 빚을 없는 것으로 탕감해 주었습니다.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기분 좋게 가다가 자신에게 100데나리온을 빚진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친구의 멱살을 잡으며 빚을 갚으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친구는 사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빚진 친구를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본 다른 사람들이 임금에게 가서 다 말했습니다. 노발대발한 임금이 일만 달란트 빚졌던 사람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마18:33)
라고 하시며. 그 사람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비유는 ‘용서’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말할 수 없이 큰 은혜를 받은 성도가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지 못하는 옹졸함을 말씀합니다.
저나 여러분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고 나누어야 합니다. 이제는 자신에게만 너그럽고 다른 사람에게는 편협한 편견을 버리고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누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