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존재하는 이유
*** 내가 존재하는 이유 ***
여러분은 혹시 이런 생각 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하나님께서 왜 나를 세상에 보내셨을까?’ 이런 생각 말입니다. 우리는 왜 세상에 보내졌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겠습니까?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이 곧 ‘철학’이라는 학문으로 정립되었고, 철학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했으며, 철학자들은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명언 중 하나를 더 보면, “진리를 사랑하고 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큰 열쇠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신의 근본에 관하여 알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찾게 하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로마서 1:19-20절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본능적인 심성을 따라 은혜를 입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영적인 깊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는 포도원 주인이 품꾼들을 부르는 비유가 있습니다.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는 오전 여섯 시를 시작으로 아홉 시와 열두 시 그리고 오후 세 시, 마지막으로 일과가 끝나기 한 시간 전인 오후 다섯 시까지 품꾼들을 농장으로 들여보냅니다. 이처럼 품꾼을 부르시는 농장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품꾼은 저와 여러분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품꾼들입니다. 달란트 비유나 므나 비유에서 부르심의 목적을 잘 보여주십니다. 마태복음 25:14-15절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으로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이렇게 각 사람을 불러 각자의 재능대로 달란트를 맡긴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품꾼들을 농장으로 들여보낼 때의 장면을 자세히 보십시오. 품꾼들의 힘이나 노력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농장 주인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터로 찾아가서 사람들을 모아서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주인이 품꾼들을 모을 때, “장터에 놀고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라고 표현했습니다. 마지막 오후 다섯 시에는 아직도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처럼 생명으로의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한복음 15: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일꾼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 마라나-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