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갈등은 왜 일어날까요?
*** 영적인 갈등은 왜 일어날까요? ***
여러분이 세상에 살면서 생활 현실과 신앙의 요구가 다를 경우가 많지요? 이렇게 다른 것 중에 가장 고민되고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조금 쉽게 표현하면,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게 있는데, 신앙 양심으로는 가책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하고 싶고 원하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걸 하자니 영의 생명이 걱정되고, 신앙을 따르자니 장래가 염려스럽기도 하고 재밋거리를 놓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머리 아프게 하는 걸 생각하지 않고, 적당하게 타협하며 무신경하게 살게 됩니다. 아니며,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도 알지만, 조금만 더 하면서 차일피일(此日彼日) 신앙의 결단을 미루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신앙의 결단은 미룰수록 마음은 힘들어지고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됩니다. 신앙의 결단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제자들에게 종말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라는 내용을 거듭 강조하십니다. 이는 깨달은 바를 결단하고 실천하라는 촉구입니다. 제가 잘 사용하는 시대적 예화가 있습니다.
루이스(C. S. Lewis) 교수가 쓴 ‘엄청난 이혼’(The Great Divorce)이라는 제목의 우화적인 작품이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엄청나게 뜨겁고, 날마다 비가 오고, 언제나 어두운 거리입니다. 하루도 거기에 살고 싶지 않은 환경입니다. 그러나 빛나는 천국으로 옮겨가는 방법을 하나님이 마련하셨습니다. 천국행 정기 버스(Shuttle Bus)를 보내신 것입니다. 매시간 떠나기 때문에 기회는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천국행 버스를 타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이 버스 정거장에 시간 맞추어 나옵니다. 그러나 버스에 올라타지를 않습니다. 요금은 무료이기 때문에 누구나 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정거장에 나와 버스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저쪽으로 가면 못할 일이 많아진다. 남의 흉을 보던 즐거움도 없어지고, 약간의 재주로 어리석은 인간들의 박수를 받고 보스 노릇 할 만족도 없어진다. 지위 노름(status game)이 거기서는 안된다. 자랑할 수도 으쓱댈 수도 없는 세상에 무엇 때문에 가는가?…”
그래서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쯤 정거장에만 나왔다가 버스는 타지 않는 일을 오래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한 가지 예고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정기 버스가 운행 중지되는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루이스 교수의 이 우화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육신을 따르는 성도의 삶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많은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생활 현실에 매여 실천을 미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이러한 현실적인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는 성령께서 성도가 육체가 원하는 것을 따르지 못하도록 하시는 역사입니다. 영적인 갈등은 영의 생명에 관심을 가질 때 일어납니다. 만일, 영의 생명에 관하여 관심이 없고, 육신을 따라 사는 일에 가책이 없다면, 당연히 이런 갈등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영적인 갈등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살지 못하도록 하는 안전장치입니다.
- 마라나-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