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만 뒤로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3,087회
작성일
2012-02-06 20:29
*** 한 걸음만 뒤로 ***
여러분은 혹시 친구나 동료, 이웃들과 다툴 일이 있다면 다툼의 원인이 주로 어떤 것입니까?
그런데 큰 싸움들도 의외로 싸움의 원인이 아주 사소한 것일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옛 말에도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금만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면 일어나지 않을 다툼들이 많습니다.
‘걸리버 여행기’라는 소설을 아시지요? 18세기 영국의 풍자적인 문인이었던 ‘조나단 스위프트’가 쓴 풍자적 소설입니다.
내용 중에는 소인의 나라와 거인의 나라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소인국의 이야기 중에는 전쟁이 나옵니다. 이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서 서로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하는데 이 전쟁에 걸리버가 말려들게 됩니다.
그런데 수 만 명의 목숨이 희생된 그 끔찍한 전쟁의 원인이 기가 막힙니다. 그 싸움의 발단은 삶은 계단을 깨뜨려서 까먹을 때에 계란의 넓은 쪽 끝을 먼저 깨뜨려서 까먹느냐? 아니면 좁은 쪽의 끝을 먼저 깨뜨려서 까먹느냐? 라는 문제였습니다. 즉 한 편은 넓은 쪽부터 깨뜨려 까는 것이 옳다고 하고. 다른 편은 좁은 쪽부터 깨뜨리는 것이 옳다고 서로 주장 하다가 마침내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참 어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쓴 조나단은 이 이야기로 세상을 풍자한 것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그토록 골몰하고 문제를 삼고 싸우고 죽이기기까지 하는 일들을 풍자한 것입니다.
서로 조금만 이해하면 될 일을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워 결국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물론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이 뜻을 모은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것만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자신을 조금만 낮추면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 걸음만 뒤로 물러서면 됩니다.
오늘 이 시대는 소리 없이 강요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문화나 환경이 그러하고, 이기적이고 황금만능주의로 변하는 사회도 그러합니다. 이런 사회에 강요당하는 요즘 아이들이 정말 불쌍합니다. 남들이 입는 옷을 입지 않으면 왕따가 되고, 최신 제품들을 갖추지 않으면 소외당하는 세상에서 아이들은 자신만의 성을 쌓아갑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이해와 배려는 사치스러운 것이겠지요!
그렇다고 이대로 버려두고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입니다. 이대로 가면 예수님께서 염려하셨던 그 말씀대로 되는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8:8절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먼저 이해하고 배려하고 관용하는 사랑을 실천합시다.
여러분은 혹시 친구나 동료, 이웃들과 다툴 일이 있다면 다툼의 원인이 주로 어떤 것입니까?
그런데 큰 싸움들도 의외로 싸움의 원인이 아주 사소한 것일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옛 말에도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금만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면 일어나지 않을 다툼들이 많습니다.
‘걸리버 여행기’라는 소설을 아시지요? 18세기 영국의 풍자적인 문인이었던 ‘조나단 스위프트’가 쓴 풍자적 소설입니다.
내용 중에는 소인의 나라와 거인의 나라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소인국의 이야기 중에는 전쟁이 나옵니다. 이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서 서로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하는데 이 전쟁에 걸리버가 말려들게 됩니다.
그런데 수 만 명의 목숨이 희생된 그 끔찍한 전쟁의 원인이 기가 막힙니다. 그 싸움의 발단은 삶은 계단을 깨뜨려서 까먹을 때에 계란의 넓은 쪽 끝을 먼저 깨뜨려서 까먹느냐? 아니면 좁은 쪽의 끝을 먼저 깨뜨려서 까먹느냐? 라는 문제였습니다. 즉 한 편은 넓은 쪽부터 깨뜨려 까는 것이 옳다고 하고. 다른 편은 좁은 쪽부터 깨뜨리는 것이 옳다고 서로 주장 하다가 마침내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참 어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쓴 조나단은 이 이야기로 세상을 풍자한 것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그토록 골몰하고 문제를 삼고 싸우고 죽이기기까지 하는 일들을 풍자한 것입니다.
서로 조금만 이해하면 될 일을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워 결국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물론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이 뜻을 모은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것만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자신을 조금만 낮추면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 걸음만 뒤로 물러서면 됩니다.
오늘 이 시대는 소리 없이 강요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문화나 환경이 그러하고, 이기적이고 황금만능주의로 변하는 사회도 그러합니다. 이런 사회에 강요당하는 요즘 아이들이 정말 불쌍합니다. 남들이 입는 옷을 입지 않으면 왕따가 되고, 최신 제품들을 갖추지 않으면 소외당하는 세상에서 아이들은 자신만의 성을 쌓아갑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이해와 배려는 사치스러운 것이겠지요!
그렇다고 이대로 버려두고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입니다. 이대로 가면 예수님께서 염려하셨던 그 말씀대로 되는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8:8절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먼저 이해하고 배려하고 관용하는 사랑을 실천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