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하는 사랑
*** 표현하는 사랑 ***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에프스끼’의 작품인 ‘카라마조프의 형제’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귀부인이 교회의 장로님에게로 와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장로님, 나는 전 세계의 문둥병자의 발에 무릎을 꿇고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상처에 입 맞출 정도의 사랑이 마음에 가득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밤중 내가 잠자려 하고 있는데, 옆방에서 계속 울어대는 갓난아이가 있으면 나는 그 갓난아이를 목 졸라 죽이고만 싶습니다. 나의 사랑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람의 마음은 우주처럼 무한한 넓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 없고, 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위의 이야기 속의 귀부인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마음속의 사랑은 너무도 크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생활과는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잠언 27:5절에서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고 하십니다. 책망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지만, 이것은 표현하지 못하는 사랑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즉 표현되지 않는 사랑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요즘 TV에서 유행하는 ‘부모와 아이들의 토크쇼’를 보면서 많이 느낀 것이 ‘부모와 자식 간에 소통이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소통이 안 되는 이유가 부모와 자녀들 서로가 표현이 서툰 것입니다. 표현이 서툴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 사랑하는 것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잘 하려면 먼저 사랑을 잘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아직도 사랑을 받는 것이 서먹합니다. 결혼생활을 40-50년씩을 한 노부부들도 포옹하는 것이나 손을 잡는 것조차 어색해 합니다. 부모자녀간에도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는 스킨십이 서먹합니다. 부부가 포옹하고 손을 잡는 것이 불법입니까? 아니면 부모와 자녀가 안아주고 손을 잡는 것이 불법입니까? 이렇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을 어색해한다면 다른 사람의 사랑, 더욱이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인간의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셔서 기꺼이 대속의 제물이 되신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요한일서 4:20절에서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가장 가까운 가족도 주 안에서 한 형제자매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려면 먼저 가장 가까운 가족들의 사랑을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일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