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져야 할 마음
*** 내가 가져야 할 마음 ***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사람들이 남의 고난을 볼 때에 다음 세 가지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고 했습니다. 첫째, 그 고난이 죄 때문이라고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즉 불행과 죄를 직결시켜버린다는 것입니다. 내 불행에 대해서는 의(義)때문이라 하고, 남의 불행에 대해서는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는 의를 위하여 고생하고, 다른 사람의 고생은 벌 받는 것이라고 죄 문제로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둘째, 남의 고난에 대해서 이해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해해보려고 하거나 관대한 눈으로 보려 하지 않고, 엄격하게 심판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지금 얼마나 어려울까?’ 또는 ‘얼마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을까?’ 이렇게 상대방의 깊은 고통을 이해해주는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셋째, 자기를 예외 시 한다는 것입니다. 나와 상대방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은 예외 규정에 넣어 버립니다. 그래서 남을 쉽게 정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대뜸 ‘선생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물음이 사람들이 소경을 보는 관점입니다. 이 물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곧 소경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소경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은 어떤 죗값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경을 인간적으로 대해주지를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그러한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경이 죄인인 것은 분명한데 다만 누구의 죄 때문인지가 의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얄팍한 지식과 경험으로 온갖 것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마치 그것이 사실인 냥 매도해 버립니다.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할 때만 해도 당시의 가톨릭은 ‘지구가 네모난 땅이며 우주의 중심으로서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천동설’을 정설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갈릴레이는 정죄 되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어린아이도 다 아는 사실을 말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잘못된 지식으로 고집하다가 사실이 밝혀지면서 낭패를 당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계속 판단하고 정죄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과 기준을 가지고 소경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편견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하지는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관용의 마음’과 ‘다른 지체를 돌아보는 사랑의 마음’으로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