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자
*** 위로자 ***
지금 우리 사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삶에 지쳐서 온통 분노를 표출합니다. 이 ‘위로’라는 말은 원어로 (나함/파라칼레오, παρακαλὲω) 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부르다’, ‘동정하다’, ‘위로받다’, ‘격려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까이서 불러줄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며, 동정을 구하지만 동정할 자가 없고, 위로와 격려를 기다리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음으로 더욱 삶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왜 이렇게 세상이 각박해집니까? 이유는 모두가 고갈되고 갈급하기 때문입니다. 만족과 평안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며 동정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들의 만족을 찾기에 더 갈급한데 말입니다. 위로자의 일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몫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위로하시고 인생을 위로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23-25절을 봅시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기억하다”라는 말은 ‘돌아보아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는 성도가 위로자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을 더욱 확실하게 밝힙니다. 성령님께서 ‘위로자’이시며, 성령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위로를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3-5,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데도 불구하고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실제의 생활에서의 경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이 잘되고 삶이 형통하면 자신이 경영을 잘 해서 그런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일이 힘들어지고 경영이 벽에 부딪칠 때면 환경과 다른 어떤 원인을 찾으며 책임을 전가하려고 합니다. ‘잘 되면 내 탓, 안 되면 조상 탓’이라고 하는 우리의 옛말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칠 때에야 비로소 자신을 돌아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 아뢰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릅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에서도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