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과 내 생각이 다를 때
*** 하나님의 뜻과 내 생각이 다를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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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진실하게 따르는 신앙의 길에는 의외로 갈등을 일으키는 복병(伏兵)들이 많습니다. 주로 신앙과 세상의 환경이 달라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예전에 청년들을 상담할 때를 보면, 대부분이 직장에서 회식이나 모임이나 부당한 일을 지시받았을 때처럼, 신앙과 부딪치는 상황들이었습니다. 예전에 어느 장로님이 간증하면서, 자신은 재정담당 이사였는데 회장이 회사에 큰 고사를 지낼 때, 회장과 함께 절해야 하는 문제로 사표를 낸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려면 당면하는 불이익뿐만 아니라, 영적인 갈등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영의 일과 세상의 일 사이에서 고민되고 갈등이 일어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몸은 위기가 닥치면, 생존을 위해 위기 대처하는 방향으로 마음이 쏠려지면서 생각이 좁아집니다. 그리스도인도 역시 세상의 생활에 위기가 닥치고 힘들어지면, 신앙과 충돌이 일어나 마음이 좁아지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아람 장군 나아만을 봅시다. 나아만은 아람의 영웅이며 장군이었지만 나병 환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아 온 어린 계집종으로부터 엘리사 선지자가 고칠 수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한껏 희망을 품고 선지자 엘리사에게 이르렀지만, 엘리사 선지자는 얼굴조차 내밀지 않고 사환을 시켜 말만 전했습니다. 그 치료법이라는 것이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라는 것입니다. 정말 강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작은 시냇물 같은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것은, 모독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를 통하여 전한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건방진 도발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을 말합니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라고 하며, 분노하여 떠났다고 했습니다. 이 일은 나아만에게 있어서는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잃을 수 있는 절대적인 위기였습니다. 바로 그 위기의 때, 나아만의 종들이 나섰습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종들의 마음에는 ‘이보다 더 쉽고 좋은 기회가 다시 올까!’라는 희망이 보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밑져봐야 본전인데 할 만하지 않느냐?’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분노한 주인에게 청을 올렸습니다. 바로 이 시점. 여기가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지점입니다. 나아만은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자신의 편협한 생각으로 기회를 놓칠 위기에 빠졌지만, 주변을 돌아보는 열린 귀가 있었습니다. 비천한 종들의 말이었지만, 그 말에 수긍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요단강으로 향했습니다. 바로 이 시점입니다. 환경이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주어질 때, 하나님의 손길에 집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럴 때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13절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걸음을 인도하시려고 우리 시대에는 성령님을 보혜사로 보내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6:9-10절입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사도 바울은 생각하고 계획했던 길이 계속 막히자, 억지로 길을 만들려고 하지 않고, 기도하며 환경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환상을 통하여 바울의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이사야 30:20-21절도 봅시다.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이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러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사도 바울이나 나아만처럼, 기도하며 주변을 돌아보는 겸손함이 있어야 깨닫게 됩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내 생각에 맞지 않는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과 내 생각이 충돌하여 갈등이 일어날 때가 우리의 생애를 가르는 분수령(分水嶺)이 될 수 있습니다. 나아만이 엘리사 선지자를 만났던 때가 나아만에게 있어서는 생애를 가르는 분수령이었습니다. 나병 환자로 사는 길과 건강한 몸으로 살 수 있는 분수령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자신의 집 종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였다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바꾸어 생각하면, 나아만 장군은 평소에도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옳은 말은 받아들일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로잡혀 온 여자아이의 말을 들은 것이나 종들의 충고를 들은 것이나 모두 나아만의 겸손한 성품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겸손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열매를 얻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며, 복의 길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입니다. 때때로 환경이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를 때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방향을 살피십시오. 그리고 순종하기가 어려운 마라의 쓴물과 같은 고통이 있을 때는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그리하면 피할 길을 예비하시고 감당할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쓴 물까지도 달게 하십니다. 즉 순종의 능력은 우리의 모든 삶을 회복하시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모두의 삶에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 마라나-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