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을 심으라.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4,271회
작성일
2002-04-13 21:20
♡♥♡♥♡ 선행을 심으라. ♡♥♡♥♡
♧♣♧♣♧ 갈라디아 6:10 ♧♣♧♣♧
선한행실은 그리스도인이 맺어야 할 열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선을 행하는 것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선한 행실이겠습니까?
첫째, 성경은 많은 경우에 남을 경제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돕고 함께 나누는 것을 선행 또는 착한 일이라고 합니다.
둘째, 좀 더 폭을 넓혀, 개인의 박애적인 행동이나 활동도 선행입니다. 디모데전서5:10절에서 선한 행실의 증거로 자녀양육이나 나그네 대접, 성도의 발 씻김, 환난 당한 자를 구제하는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올바른 동기로 윗사람에 대해 순종 자세를 취하는 경우 이것도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6장에 의하면 상전에 대해서 주께 하듯 하는 모든 것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곧 선행이라고 했습니다. 즉 나타나는 행위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있는 용기와 자세를 가진 모든 행동이 선행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넷째,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행하는 삶 전체가 선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2:5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살리심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의 인 치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증거 하십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이렇게 된 목적이 선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그 선한 일은 올바른 생각과 언어와 습관과 행동을 포함한 생활양식이며, 사람과의 모든 관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행하는 모든 것은 선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구제, 헌금, 박애행위, 순종 등 외적 행위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런 행동 뒤에 올바른 동기와 목적의식을 소유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우리가 행하는 선한 일의 뒷면에는 어떠한 동기와 목적의식이 있는지요?
영국의 철학자 ‘카알라일’은 ‘위대한 사람이란 곧 일을 시작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시작이 절반’이란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을 시작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선한 생각과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선뜻 그 일을 시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은 시작한 일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일입니다. 봄에 씨앗을 뿌렸다고 그것이 저절로 결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은 수고가 있은 후에야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아예 시작할 엄두도 못 내거나, 아니면 겨우 시작은 하였지만 얼마 못가서 포기하고 맙니다. 처음시작은 요란스럽다가도 나중에는 흐지부지해지는 ‘용두사미’꼴이 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계속해 나가는 사람은 더욱 귀한 사람입니다.
선한 일에는 어려운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선을 행하되 낙심치 말라.’(갈6:10)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선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일이 무척 어렵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패역한 시대를 역행하여 산다는 것은 고독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이 하는 대로 대강대강 살아가는 일이야 쉽지만, 정의를 지키고, 진리를 전파하는 선한 일에는 반드시 고독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갈릴리의 푸른 호수와 죽음의 바다인 사해를 연결하는 요단강의 물고기는 물줄기를 거스르며 올라가야만 생명을 보존하는 갈릴리 호수에 이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편안히 물결에 몸을 맡기며, 강을 거슬러 오르는 자신을 비웃는다 할지라도 살아있는 물고기라면 계속 헤엄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천국의 영광을 생각하며 말입니다.
♧♣♧♣♧ 갈라디아 6:10 ♧♣♧♣♧
선한행실은 그리스도인이 맺어야 할 열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선을 행하는 것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선한 행실이겠습니까?
첫째, 성경은 많은 경우에 남을 경제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돕고 함께 나누는 것을 선행 또는 착한 일이라고 합니다.
둘째, 좀 더 폭을 넓혀, 개인의 박애적인 행동이나 활동도 선행입니다. 디모데전서5:10절에서 선한 행실의 증거로 자녀양육이나 나그네 대접, 성도의 발 씻김, 환난 당한 자를 구제하는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올바른 동기로 윗사람에 대해 순종 자세를 취하는 경우 이것도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6장에 의하면 상전에 대해서 주께 하듯 하는 모든 것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곧 선행이라고 했습니다. 즉 나타나는 행위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있는 용기와 자세를 가진 모든 행동이 선행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넷째,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행하는 삶 전체가 선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2:5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살리심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의 인 치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증거 하십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이렇게 된 목적이 선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그 선한 일은 올바른 생각과 언어와 습관과 행동을 포함한 생활양식이며, 사람과의 모든 관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행하는 모든 것은 선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구제, 헌금, 박애행위, 순종 등 외적 행위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런 행동 뒤에 올바른 동기와 목적의식을 소유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우리가 행하는 선한 일의 뒷면에는 어떠한 동기와 목적의식이 있는지요?
영국의 철학자 ‘카알라일’은 ‘위대한 사람이란 곧 일을 시작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시작이 절반’이란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을 시작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선한 생각과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선뜻 그 일을 시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은 시작한 일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일입니다. 봄에 씨앗을 뿌렸다고 그것이 저절로 결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은 수고가 있은 후에야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아예 시작할 엄두도 못 내거나, 아니면 겨우 시작은 하였지만 얼마 못가서 포기하고 맙니다. 처음시작은 요란스럽다가도 나중에는 흐지부지해지는 ‘용두사미’꼴이 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계속해 나가는 사람은 더욱 귀한 사람입니다.
선한 일에는 어려운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선을 행하되 낙심치 말라.’(갈6:10)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선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일이 무척 어렵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패역한 시대를 역행하여 산다는 것은 고독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이 하는 대로 대강대강 살아가는 일이야 쉽지만, 정의를 지키고, 진리를 전파하는 선한 일에는 반드시 고독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갈릴리의 푸른 호수와 죽음의 바다인 사해를 연결하는 요단강의 물고기는 물줄기를 거스르며 올라가야만 생명을 보존하는 갈릴리 호수에 이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편안히 물결에 몸을 맡기며, 강을 거슬러 오르는 자신을 비웃는다 할지라도 살아있는 물고기라면 계속 헤엄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천국의 영광을 생각하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