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짐에 눌린 사람들에게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4,157회
작성일
2002-03-23 14:09
♡♥♡♥♡ 인생의 짐에 눌린 사람들에게 ♡♥♡♥♡
♧♣♧♣♧ 마11:28-30 ♧♣♧♣♧
가장 강한 것 같으면서도 가장 약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사람들은 온갖 문명을 발달시켜 편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해 왔습니다. 하지만 과학과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더 많은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우울증이라든지 대인공포증이라든지 정신과적 질환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풍족해지고 발전한 현대에는 정신질환으로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의 조지아 주 ‘아틀란타’에 있는 연방 교도소의 목사였던 ‘파크 터커’ 박사는 삶에 대한 많은 걱정과 침울한 마음으로 도시의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가 우연히 고개를 들어 길 건너를 보았습니다. 마침 장례식을 거행하는 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례식장의 창문 위에 씌어있는 글씨를 보면서 자신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창문 위에 커다랗고 뚜렷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는 것을 확실히 보았습니다.
“당신은 왜 절반쯤 죽어 있는 상태로 걷고 있는가? 우리는 당신을 69달러 50센트에 묻어줄 수 있고, 그 위에 푸른 잔디도 입혀줄 수 있다.”
터커 박사는 이 유머러스한 문구가 자신의 영혼에 좋은 약이 되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글처럼 많은 현대인들이 너무나 무거운 인생의 짐으로 인하여 반쯤 죽은 상태로 헤매고 있습니다.
자신이 걱정해보지만 해결할 방도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산더미 같은 문제 거리를 안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이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 짐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요?
그런데 짐을 내려놓으면 편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왜 짐을 지고 괴로워하는가요?
아하! 어디다 어떻게 내려놓아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지요? 다음의 이야기를 한 번 읽어보십시오.
1780년 5월경 뉴잉글랜드에서 원인을 알 수 없이 하늘이 어두워지는 돌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시내는 온통 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세상사를 다 버리고 오로지 기도와 선한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최후의 심판 날이 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 암흑은 하나님의 진노의 징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마침 코네티컷 주의 의회가 개최 중이었습니다. 의회가 한참 중반전에 들어왔을 때 하늘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회의를 연기하자는 동의가 있었습니다. 의원 중한 사람이 동의하지 않고 일어나 발언했습니다.
“의장, 오늘이 최후의 심판의 날이든지 아니든지 상관할게 아닙니다. 만일 심판의 날이 아니라면 연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만일 심판의 날이라고 해도 우리의 의무를 알아야 합니다. 촛불을 켜고 회의를 진행할 것을 제의합니다.”
만일 이런 일이 지금 일어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만일 당황스럽고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모른다면 이는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아직 자신이 인생의 짐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의원의 제안처럼 매 순간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있다면 당황할 일이 없겠지요.
그리고 지나간 일이든지, 미래의 일이든지 모든 일은 그 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맡겨두는 것입니다. 다만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 마11:28-30 ♧♣♧♣♧
가장 강한 것 같으면서도 가장 약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사람들은 온갖 문명을 발달시켜 편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해 왔습니다. 하지만 과학과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더 많은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우울증이라든지 대인공포증이라든지 정신과적 질환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풍족해지고 발전한 현대에는 정신질환으로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의 조지아 주 ‘아틀란타’에 있는 연방 교도소의 목사였던 ‘파크 터커’ 박사는 삶에 대한 많은 걱정과 침울한 마음으로 도시의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가 우연히 고개를 들어 길 건너를 보았습니다. 마침 장례식을 거행하는 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례식장의 창문 위에 씌어있는 글씨를 보면서 자신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창문 위에 커다랗고 뚜렷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는 것을 확실히 보았습니다.
“당신은 왜 절반쯤 죽어 있는 상태로 걷고 있는가? 우리는 당신을 69달러 50센트에 묻어줄 수 있고, 그 위에 푸른 잔디도 입혀줄 수 있다.”
터커 박사는 이 유머러스한 문구가 자신의 영혼에 좋은 약이 되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글처럼 많은 현대인들이 너무나 무거운 인생의 짐으로 인하여 반쯤 죽은 상태로 헤매고 있습니다.
자신이 걱정해보지만 해결할 방도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산더미 같은 문제 거리를 안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이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 짐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요?
그런데 짐을 내려놓으면 편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왜 짐을 지고 괴로워하는가요?
아하! 어디다 어떻게 내려놓아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지요? 다음의 이야기를 한 번 읽어보십시오.
1780년 5월경 뉴잉글랜드에서 원인을 알 수 없이 하늘이 어두워지는 돌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시내는 온통 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세상사를 다 버리고 오로지 기도와 선한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최후의 심판 날이 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 암흑은 하나님의 진노의 징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마침 코네티컷 주의 의회가 개최 중이었습니다. 의회가 한참 중반전에 들어왔을 때 하늘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회의를 연기하자는 동의가 있었습니다. 의원 중한 사람이 동의하지 않고 일어나 발언했습니다.
“의장, 오늘이 최후의 심판의 날이든지 아니든지 상관할게 아닙니다. 만일 심판의 날이 아니라면 연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만일 심판의 날이라고 해도 우리의 의무를 알아야 합니다. 촛불을 켜고 회의를 진행할 것을 제의합니다.”
만일 이런 일이 지금 일어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만일 당황스럽고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모른다면 이는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아직 자신이 인생의 짐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의원의 제안처럼 매 순간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있다면 당황할 일이 없겠지요.
그리고 지나간 일이든지, 미래의 일이든지 모든 일은 그 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맡겨두는 것입니다. 다만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