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담은 그릇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4,049회
작성일
2002-03-17 21:20
♡♥♡♥♡ 하나님을 담은 그릇 ♡♥♡♥♡
♧♣♧♣♧ 고린도후서4:6,7 ♧♣♧♣♧
사람은 하나님을 담는 그릇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4:7절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디모데후서2:20-21절에서는,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신을 깨끗하게 비워두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으로 채우시는 것입니다.
‘막스 베버’는 “서양의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도구로 보았고, 동양종교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을 담는 그릇으로 보았다.”고 했습니다.
막스의 표현대로 도구가 주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합니다. 쉴 새 없이 근면하고 뛰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담는 그릇이라면, 그 그릇은 하나님께서 머무를 수 있도록 그릇을 비우고 마음을 깨끗하게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도구는 주인 앞에서 잘 해야 인정을 받고 노임을 받지만, 그릇은 단지 마음 문을 열고 의지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신성(神性)이 와서 고이기를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도구로 생각했던 서양에서는 부지런히 일하고 저축하여 부의 축적과 자본주의의 형성을 이루었습니다. 종교 개혁가들의 사상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생산성은 높은 반면에 사람은 쉼이 없고 언제나 기계처럼 바빴고 결국에는 인간 소외를 가져왔습니다. 투쟁과 싸움과 정복과 지배가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이로 인하여 인간소외가 만연해졌습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그릇이라고 느꼈던 동양에서는 가난하고 생산성이 낮았습니다. 무엇이든지 완만하고 초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양의 기독교 사상을 가진 나라들로부터 침략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적 기독교는 마음이 초조하지 않아 정신적으로 더 건강합니다.
이 정도에서 성경을 통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성경은 서양적인 사상이 아니라 동양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계시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그릇에 하나님 자신의 신성을 담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약의 황금률이라고 부르는 미가서6:6-8절을 봅시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베드로전서5:2-3절을 봅시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조용하면서도 내면으로 타오르는 하나님을 향하는 열정이 배여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자신을 나타내는 성취감도, 남을 억압하거나 짓밟고서라도 일어서려는 과도한 만용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므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조용히 주님을 바라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 고린도후서4:6,7 ♧♣♧♣♧
사람은 하나님을 담는 그릇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4:7절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디모데후서2:20-21절에서는,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신을 깨끗하게 비워두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으로 채우시는 것입니다.
‘막스 베버’는 “서양의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도구로 보았고, 동양종교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을 담는 그릇으로 보았다.”고 했습니다.
막스의 표현대로 도구가 주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합니다. 쉴 새 없이 근면하고 뛰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담는 그릇이라면, 그 그릇은 하나님께서 머무를 수 있도록 그릇을 비우고 마음을 깨끗하게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도구는 주인 앞에서 잘 해야 인정을 받고 노임을 받지만, 그릇은 단지 마음 문을 열고 의지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신성(神性)이 와서 고이기를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도구로 생각했던 서양에서는 부지런히 일하고 저축하여 부의 축적과 자본주의의 형성을 이루었습니다. 종교 개혁가들의 사상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생산성은 높은 반면에 사람은 쉼이 없고 언제나 기계처럼 바빴고 결국에는 인간 소외를 가져왔습니다. 투쟁과 싸움과 정복과 지배가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이로 인하여 인간소외가 만연해졌습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그릇이라고 느꼈던 동양에서는 가난하고 생산성이 낮았습니다. 무엇이든지 완만하고 초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양의 기독교 사상을 가진 나라들로부터 침략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적 기독교는 마음이 초조하지 않아 정신적으로 더 건강합니다.
이 정도에서 성경을 통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성경은 서양적인 사상이 아니라 동양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계시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그릇에 하나님 자신의 신성을 담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약의 황금률이라고 부르는 미가서6:6-8절을 봅시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베드로전서5:2-3절을 봅시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조용하면서도 내면으로 타오르는 하나님을 향하는 열정이 배여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자신을 나타내는 성취감도, 남을 억압하거나 짓밟고서라도 일어서려는 과도한 만용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므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조용히 주님을 바라고 순종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