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와 자리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5,094회
작성일
2002-03-02 17:25
♡♥♡♥♡ 때와 자리 ♡♥♡♥♡
♧♣♧♣♧ 요7:1-13 ♧♣♧♣♧
하나님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적당한 때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물론 쓰임새나 가치는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때와 목적은 자신의 자리입니다. 군인은 적군이 침투했을 때에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싸움을 위하여 힘들고 어려운 훈련과 시련의 시간을 지나야 합니다. 이것이 군인의 자리입니다. 만일 적군이 침투하지 않은 평상시에 아무하고나 싸운다면 이는 분명히 자신의 자리를 벗어난 것입니다.
카프만 부인이 쓴 ‘광야의 샘’이란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누에고치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마침 여러 마리의 누에고치가 나비로 탈바꿈을 하는 중이었다. 너무도 작은 구멍을 통해 나오려고 애쓰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불가능 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마리, 두 마리, 그토록 작은 구멍을 통해 천신만고 애쓰더니 결국은 빠져 나와서 공중으로 훨훨 날아올랐다. 나는 마침 또 나오려고 애쓰는 고치를 발견하고 가위로 그 구멍을 넓게 잘라 주었다. 그러면서 내가 하나님보다 더욱 사랑과 자비가 많다고 자족하면서 혼자 웃었다. 내가 넓게 열어준 구멍으로 나비는 쉽게 나왔으나 문제가 생겼다. 공중으로 솟아오르려고 몇 번 시도하면서도 결국 오르지 못하고 땅바닥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앗차!! 나는 깨달았다. 작은 구멍에서 고통하며 힘쓰면서 나와야 그 몸의 영양분을 날개 끝까지 공급하게 되고, 날개가 나올 때 심하게 마찰되면서 날아오를 만큼 강건해 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119:71절에서,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때와 목적은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도 각자에게 주신 삶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어느 누구도 대신 하지 못하는 자신만의 자리입니다. 이것을 성도 개개인에게 주어진 목적과 그 목적이 이룰 때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지혜로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목적을 알고, 그 목적을 위한 적당한 때와 자신이 머물 자리를 아는 것입니다. 나서야 할 때와 나서지 않아야 할 때, 일할 때와 머물 때를 알고 구별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은 이 구별을 잘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하며,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때와 자리를 분명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는 ‘초막절’에 행하신 예수님의 행적이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동생들의 조언을 듣고 대담하시는 부분이 앞쪽에 있습니다.
동생들은 예수님이 큰 도시에 나가서 많은 사람 앞에서 능력을 행하여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동생들의 사고방식이 지극히 불신앙적이며 세상적임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때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유명해지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실 때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한 바로 그 때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과 멸시와 죽음이 예수님의 자리였습니다.
오늘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자리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신의 목적과 때를 따라서 그 자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 요7:1-13 ♧♣♧♣♧
하나님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적당한 때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물론 쓰임새나 가치는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때와 목적은 자신의 자리입니다. 군인은 적군이 침투했을 때에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싸움을 위하여 힘들고 어려운 훈련과 시련의 시간을 지나야 합니다. 이것이 군인의 자리입니다. 만일 적군이 침투하지 않은 평상시에 아무하고나 싸운다면 이는 분명히 자신의 자리를 벗어난 것입니다.
카프만 부인이 쓴 ‘광야의 샘’이란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누에고치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마침 여러 마리의 누에고치가 나비로 탈바꿈을 하는 중이었다. 너무도 작은 구멍을 통해 나오려고 애쓰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불가능 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마리, 두 마리, 그토록 작은 구멍을 통해 천신만고 애쓰더니 결국은 빠져 나와서 공중으로 훨훨 날아올랐다. 나는 마침 또 나오려고 애쓰는 고치를 발견하고 가위로 그 구멍을 넓게 잘라 주었다. 그러면서 내가 하나님보다 더욱 사랑과 자비가 많다고 자족하면서 혼자 웃었다. 내가 넓게 열어준 구멍으로 나비는 쉽게 나왔으나 문제가 생겼다. 공중으로 솟아오르려고 몇 번 시도하면서도 결국 오르지 못하고 땅바닥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앗차!! 나는 깨달았다. 작은 구멍에서 고통하며 힘쓰면서 나와야 그 몸의 영양분을 날개 끝까지 공급하게 되고, 날개가 나올 때 심하게 마찰되면서 날아오를 만큼 강건해 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119:71절에서,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때와 목적은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도 각자에게 주신 삶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어느 누구도 대신 하지 못하는 자신만의 자리입니다. 이것을 성도 개개인에게 주어진 목적과 그 목적이 이룰 때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지혜로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목적을 알고, 그 목적을 위한 적당한 때와 자신이 머물 자리를 아는 것입니다. 나서야 할 때와 나서지 않아야 할 때, 일할 때와 머물 때를 알고 구별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은 이 구별을 잘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하며,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때와 자리를 분명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는 ‘초막절’에 행하신 예수님의 행적이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동생들의 조언을 듣고 대담하시는 부분이 앞쪽에 있습니다.
동생들은 예수님이 큰 도시에 나가서 많은 사람 앞에서 능력을 행하여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동생들의 사고방식이 지극히 불신앙적이며 세상적임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때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유명해지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실 때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한 바로 그 때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과 멸시와 죽음이 예수님의 자리였습니다.
오늘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자리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신의 목적과 때를 따라서 그 자리에 머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