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위한 열망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4,450회
작성일
2002-01-26 22:24
♡♥♡♥♡ 꿈을 위한 열망 ♡♥♡♥♡
☆★☆★☆ 마태복음 15:21-28 ☆★☆★☆
사람은 꿈(소망)을 위하여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내일에 대한 비전(꿈)이 오늘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만일 꿈이 없는 사람이라면 한갓 미물처럼 오늘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면서 되는 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함석헌 옹은 “꿈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소중한 꿈은 그 사람의 ‘신념’으로 굳어집니다.
태국과 등을 맞대고 있는 라오스의 ‘시폼 마을’은 인상적인 염전지대라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더욱 인상적인 것은 열대의 수목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는 끝없는 염전 풍경이 아니라, 그 염전을 연인삼아 살아가는 시폼 마을 염전지기들의 삶입니다.
인류학자들의 보고문서에 의하면, 시폼 염전의 염전지기들에겐 일생 동안 지켜 내려오는 두 가지 금기, 즉 두 가지 맹세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염전지기로 살아가는 한 결코 작열하는 태양의 직사광선을 피하기 위해 모자나 수건 따위로 머리를 가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따가운 태양열로부터 피하기 위해 차양의 그늘이나 양산의 그늘 아래로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라오스의 태양은 전 국토를 밀림으로 뒤덮이게 할 만큼 혹독하고 살인적인 열대의 태양임에 분명합니다. 이 태양 아래서 오직 자신이 염전지기라는 이유만으로 일생 동안 머리에 모자를 쓰지 않고 양산이나 차양의 그늘 아래 머리를 숨기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신념의 차원을 넘어서 차라리 신앙과 같은 것입니다.
일년 내내 수고해봐야 몇 가마니의 천연소금을 얻는 것이 전부인 염전지기가 자신의 염전에 소금이 있게 하는 태양을 위해 바치는 정절도 그쯤이면 참으로 숭고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소망이 되는 소금을 만들 수 있게 하는 태양을 위한 정성도 그쯤이면 정말 신앙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의 그리스도인들은 라오스 시폼 마을의 염전지기들 만도 못할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단순히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출세하는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이 세상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원한 낙원인 하나님의 나라를 얻고자 하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단지 몇 가마니의 소금을 얻기 위하여 그처럼 단호한 신념을 소유한 염전지기들보다는 더 나은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문(마15:21-28)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만 보더라도 그러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개’로 취급되는 이방여인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조차 냉대를 받았습니다. 가나안 여인에게 있어서의 예수님은 마지막 희망이자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자신의 딸을 고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딸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소망으로 가득 찬 가나안 여인에게 있어서 냉대와 모멸감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인은 외칩니다.
‘개라도 좋습니다. 하지만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이쯤 되면 주님을 향한 신앙은 없었을 지라도 소망을 향하는 신념은 신앙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물론 바로 그 시간부터 딸의 병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여인이 소원을 이룬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망을 향하는 열정은 어떠합니까?
☆★☆★☆ 마태복음 15:21-28 ☆★☆★☆
사람은 꿈(소망)을 위하여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내일에 대한 비전(꿈)이 오늘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만일 꿈이 없는 사람이라면 한갓 미물처럼 오늘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면서 되는 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함석헌 옹은 “꿈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소중한 꿈은 그 사람의 ‘신념’으로 굳어집니다.
태국과 등을 맞대고 있는 라오스의 ‘시폼 마을’은 인상적인 염전지대라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더욱 인상적인 것은 열대의 수목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는 끝없는 염전 풍경이 아니라, 그 염전을 연인삼아 살아가는 시폼 마을 염전지기들의 삶입니다.
인류학자들의 보고문서에 의하면, 시폼 염전의 염전지기들에겐 일생 동안 지켜 내려오는 두 가지 금기, 즉 두 가지 맹세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염전지기로 살아가는 한 결코 작열하는 태양의 직사광선을 피하기 위해 모자나 수건 따위로 머리를 가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따가운 태양열로부터 피하기 위해 차양의 그늘이나 양산의 그늘 아래로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라오스의 태양은 전 국토를 밀림으로 뒤덮이게 할 만큼 혹독하고 살인적인 열대의 태양임에 분명합니다. 이 태양 아래서 오직 자신이 염전지기라는 이유만으로 일생 동안 머리에 모자를 쓰지 않고 양산이나 차양의 그늘 아래 머리를 숨기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신념의 차원을 넘어서 차라리 신앙과 같은 것입니다.
일년 내내 수고해봐야 몇 가마니의 천연소금을 얻는 것이 전부인 염전지기가 자신의 염전에 소금이 있게 하는 태양을 위해 바치는 정절도 그쯤이면 참으로 숭고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소망이 되는 소금을 만들 수 있게 하는 태양을 위한 정성도 그쯤이면 정말 신앙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의 그리스도인들은 라오스 시폼 마을의 염전지기들 만도 못할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단순히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출세하는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이 세상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원한 낙원인 하나님의 나라를 얻고자 하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단지 몇 가마니의 소금을 얻기 위하여 그처럼 단호한 신념을 소유한 염전지기들보다는 더 나은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문(마15:21-28)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만 보더라도 그러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개’로 취급되는 이방여인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조차 냉대를 받았습니다. 가나안 여인에게 있어서의 예수님은 마지막 희망이자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자신의 딸을 고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딸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소망으로 가득 찬 가나안 여인에게 있어서 냉대와 모멸감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인은 외칩니다.
‘개라도 좋습니다. 하지만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이쯤 되면 주님을 향한 신앙은 없었을 지라도 소망을 향하는 신념은 신앙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물론 바로 그 시간부터 딸의 병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여인이 소원을 이룬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망을 향하는 열정은 어떠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