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사는 것일까?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4,683회
작성일
2002-08-10 21:58
♡♥♡♥♡ 나는 왜 사는 것일까? ♡♥♡♥♡
♧♣♧♣♧ 갈라디아서 2:20 ♧♣♧♣♧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 것일까?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무슨 철학자 같은 냄새가 풍깁니까? 한 여름에도 깃을 세운 검은 바바리코트를 입고 꾀죄죄한 몰골로 공원 벤치에서 사색에 잠긴 철학자 후보생의 고민 같습니까?
키우던 검둥이가 며칠 전에 사람을 위해 희생했답니다. 이 영이 없는 짐승들은 육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립니다. 짐승들에게는 내세(來世)도 소망(素望)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람들에게는 내세가 있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그 내세와 소망을 위하여 준비하도록 시간과 재능이 주어져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소명(召命)’이 있습니다. 소명이란, 임금의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이루어야 할 목표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설교자인 ‘스펄젼’ 목사님은 교회를 많이 부흥시킨 역사적인 분이십니다. 어떤 제자가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영력 있는 설교를 하시며,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습니까?”
목사님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데리고 교회 지하실로 안내했습니다. 그 지하실에는 기도실이 있었고, 그 곳에는 기도하고 계시는 두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제자에게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할머니들께서 교회와 저를 위하여 기도하므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 분들은 교회를 위하는 깨끗한 소원 이 외에는 아무런 소원이 없는 분들이십니다. 이름도 명예도 없이 드리는 이 기도 때문에 교회가 건재합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아주 작은 일,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협력하고 동참함으로서 큰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으면서도 이런 저런 핑계로 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또한 부르심에 대한 자신의 일을 외면하는 것은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짐승들도 후손을 남기려는 성적(性的)본능이 있으며, 자기 생명보존을 위한 본능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것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과 자신의 창조주를 기억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데 있습니다. 다만 먹고 즐기고 생존하기 위해서라면 짐승일 뿐입니다.
주님은 말 그대로 내 생명과 삶의 주인(主人)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부르신 주님의 위해서 산다는 것은 우리 부름 받은 사람들의 본분(本分)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삶에는 결코 후회가 없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며, 주님이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 ‘크리소스톰’의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법으로 금한 기독교 복음을 증거 한다고 체포당하여 감옥에 갔을 때입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복음화 하라고 이곳에 저를 파송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그는 감옥 속에서도 쉬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결국 그는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기도는,
“주님, 감사합니다. 성도의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 순교라고 했는데, 저 같은 사람을 순교의 반열에 동참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크리소스톰은 사형장으로 끌려갑니다. 그러나 성 크리소스톰에게 교수형이 집행되려고 할 때 갑자기 사형 중지명령이 내렸습니다. 그때도 크리소스톰은 눈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직도 종에게 할 일이 더 남았다는 것입니까? 죽도록 충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이제 내가 사는 것이 나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순종하며 감사하면서 주님의 뒤를 따라갑시다.
♧♣♧♣♧ 갈라디아서 2:20 ♧♣♧♣♧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 것일까?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무슨 철학자 같은 냄새가 풍깁니까? 한 여름에도 깃을 세운 검은 바바리코트를 입고 꾀죄죄한 몰골로 공원 벤치에서 사색에 잠긴 철학자 후보생의 고민 같습니까?
키우던 검둥이가 며칠 전에 사람을 위해 희생했답니다. 이 영이 없는 짐승들은 육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립니다. 짐승들에게는 내세(來世)도 소망(素望)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람들에게는 내세가 있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그 내세와 소망을 위하여 준비하도록 시간과 재능이 주어져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소명(召命)’이 있습니다. 소명이란, 임금의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이루어야 할 목표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설교자인 ‘스펄젼’ 목사님은 교회를 많이 부흥시킨 역사적인 분이십니다. 어떤 제자가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영력 있는 설교를 하시며,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습니까?”
목사님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데리고 교회 지하실로 안내했습니다. 그 지하실에는 기도실이 있었고, 그 곳에는 기도하고 계시는 두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제자에게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할머니들께서 교회와 저를 위하여 기도하므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 분들은 교회를 위하는 깨끗한 소원 이 외에는 아무런 소원이 없는 분들이십니다. 이름도 명예도 없이 드리는 이 기도 때문에 교회가 건재합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아주 작은 일,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협력하고 동참함으로서 큰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으면서도 이런 저런 핑계로 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또한 부르심에 대한 자신의 일을 외면하는 것은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짐승들도 후손을 남기려는 성적(性的)본능이 있으며, 자기 생명보존을 위한 본능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것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과 자신의 창조주를 기억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데 있습니다. 다만 먹고 즐기고 생존하기 위해서라면 짐승일 뿐입니다.
주님은 말 그대로 내 생명과 삶의 주인(主人)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부르신 주님의 위해서 산다는 것은 우리 부름 받은 사람들의 본분(本分)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삶에는 결코 후회가 없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며, 주님이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 ‘크리소스톰’의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법으로 금한 기독교 복음을 증거 한다고 체포당하여 감옥에 갔을 때입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복음화 하라고 이곳에 저를 파송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그는 감옥 속에서도 쉬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결국 그는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기도는,
“주님, 감사합니다. 성도의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 순교라고 했는데, 저 같은 사람을 순교의 반열에 동참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크리소스톰은 사형장으로 끌려갑니다. 그러나 성 크리소스톰에게 교수형이 집행되려고 할 때 갑자기 사형 중지명령이 내렸습니다. 그때도 크리소스톰은 눈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직도 종에게 할 일이 더 남았다는 것입니까? 죽도록 충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이제 내가 사는 것이 나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순종하며 감사하면서 주님의 뒤를 따라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