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미래보장형 삶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4,277회
작성일
2002-05-26 21:30
♡♥♡♥♡ 영적 미래보장형 삶 ♡♥♡♥♡
♧♣♧♣♧ 디모데전서6:18,19 ♧♣♧♣♧
(딤전6:18,19)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
여러분은 세상에서 멋지게 사는 사람을 꼽으라면 어떤 사람들을 꼽겠습니까?
저는 ‘다운사람’을 꼽을 것입니다. ‘다운사람’이란, 자신의 신분과 환경과 일에 꼭 알맞게 처신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목사는 목사답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답게, 말단 사원은 말단사원답게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일에 대하여 처신하고 행동하는 것이 멋진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로 그리스도인을 조명해 본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일까요?
'20세기의 예수'라고 불린 ‘슈바이처’ 박사는 검은 대륙 아프리카 ‘랍바네대’ 병원에서 죽어가는 생명들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도 부족하여 모금 운동에 나서기까지 했습니다.
한번은 모금 차 자신의 고향에 돌아왔는데, 고향 역에는 그를 영접하려는 많은 친척친지와 동료들이 모여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으레 1등 칸이나, 2등 칸에서 나올 줄 알고 그 앞에 모여 있었는데, 박사는 맨 뒤쪽인 3등 칸에서 내렸습니다.
영접 객들이 달려가 얼싸 안으면서,
“어째서 3등 칸에 타셨습니까?”
하고 원망조로 물었습니다. 그러자 박사는 피시시 웃으면서,
“4등 칸이 있어야지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산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 섬김과 봉사의 삶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만드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10:45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섬김과 희생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다운’삶은 섬김과 봉사와 희생의 삶이 분명합니다. 이런 삶은 보상이 약속되어 있는 ‘영적 미래보장형’삶입니다.
또 하나, 슈바이처 박사의 저서인 ‘아프리카의 이야기’에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지만 읽으면 마음이 괴로운 사연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산중에서 맹수에게 쫓기고 있는 토인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같은 토인은 그 쫓기고 있는 사람이 어느 부족에 속한 종족인가를 살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자기 부족의 한 사람인 것이 확인되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그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서 온갖 희생을 감수합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 사람이 다른 종족으로 인식이 되면 전혀 무관심하게 그냥 지나쳐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철저한 너와 나의 구별은 부족의 한계에서 너무도 선명해지는 것이 아프리카 토인의 당연한 윤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흔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면서 마음 한 구석이 찡해져 옵니다.
우리는 엄격히 보면 ‘나’이외에는 모두 타인입니다. 가족도 친구도 모두 타인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부도, 부모 자식을 이루는 가정도 한 순간에 무너집니다. 모두가 ‘나’를 기준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15:13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6:2절에서는,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하십니다.
서로 협력하고 돕는 봉사하는 마음은 인간다움을 이루는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의 이익을 떠난 봉사와 섬김과 희생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이루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쏙 빼닮은 그리스도인다움은 아름답고 영원한 미래가 보장되는 ‘영적 미래보장형 삶’을 이루는 길입니다.
♧♣♧♣♧ 디모데전서6:18,19 ♧♣♧♣♧
(딤전6:18,19)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
여러분은 세상에서 멋지게 사는 사람을 꼽으라면 어떤 사람들을 꼽겠습니까?
저는 ‘다운사람’을 꼽을 것입니다. ‘다운사람’이란, 자신의 신분과 환경과 일에 꼭 알맞게 처신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목사는 목사답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답게, 말단 사원은 말단사원답게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일에 대하여 처신하고 행동하는 것이 멋진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로 그리스도인을 조명해 본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일까요?
'20세기의 예수'라고 불린 ‘슈바이처’ 박사는 검은 대륙 아프리카 ‘랍바네대’ 병원에서 죽어가는 생명들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도 부족하여 모금 운동에 나서기까지 했습니다.
한번은 모금 차 자신의 고향에 돌아왔는데, 고향 역에는 그를 영접하려는 많은 친척친지와 동료들이 모여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으레 1등 칸이나, 2등 칸에서 나올 줄 알고 그 앞에 모여 있었는데, 박사는 맨 뒤쪽인 3등 칸에서 내렸습니다.
영접 객들이 달려가 얼싸 안으면서,
“어째서 3등 칸에 타셨습니까?”
하고 원망조로 물었습니다. 그러자 박사는 피시시 웃으면서,
“4등 칸이 있어야지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산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 섬김과 봉사의 삶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만드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10:45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섬김과 희생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다운’삶은 섬김과 봉사와 희생의 삶이 분명합니다. 이런 삶은 보상이 약속되어 있는 ‘영적 미래보장형’삶입니다.
또 하나, 슈바이처 박사의 저서인 ‘아프리카의 이야기’에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지만 읽으면 마음이 괴로운 사연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산중에서 맹수에게 쫓기고 있는 토인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같은 토인은 그 쫓기고 있는 사람이 어느 부족에 속한 종족인가를 살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자기 부족의 한 사람인 것이 확인되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그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서 온갖 희생을 감수합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 사람이 다른 종족으로 인식이 되면 전혀 무관심하게 그냥 지나쳐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철저한 너와 나의 구별은 부족의 한계에서 너무도 선명해지는 것이 아프리카 토인의 당연한 윤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흔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면서 마음 한 구석이 찡해져 옵니다.
우리는 엄격히 보면 ‘나’이외에는 모두 타인입니다. 가족도 친구도 모두 타인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부도, 부모 자식을 이루는 가정도 한 순간에 무너집니다. 모두가 ‘나’를 기준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15:13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6:2절에서는,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하십니다.
서로 협력하고 돕는 봉사하는 마음은 인간다움을 이루는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의 이익을 떠난 봉사와 섬김과 희생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이루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쏙 빼닮은 그리스도인다움은 아름답고 영원한 미래가 보장되는 ‘영적 미래보장형 삶’을 이루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