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기 때문에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5,851회
작성일
2003-12-06 23:03
♡♥♡♥♡ 살아 있기 때문에 ♡♥♡♥♡
♧♣♧♣♧ 누가복음 14: 34-35 ♧♣♧♣♧
짠물인 바다 속의 생물들은 몸이 짤까요?
여러분이 바다 생선의 회를 먹을 때에 맛이 짜던가요?
바닷물은 분명히 짠데도 불구하고 생선은 짠 맛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생선 특유의 달고 상큼한 맛이 납니다. 그런데 죽은 생선에 간을 하기 위하여 소금을 뿌리면 생선은 짜게 됩니다. 짠 바닷물에서 사는 생선이 짜지 않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살아있기 때문이지요.
바다 생물들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짠물을 먹고 살지만 하나님께서 짠 맛을 걸러내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죽으면 그 능력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짜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죄악의 어두움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지만 어두움이 배어들지 않는 것은 영의 생명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상큼한 사랑과 빛을 내어 세상을 밝힙니다. 만일 영이 죽는다면 고스란히 죄의 어두움이 배어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두움이 배이게 되면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본연의 자세를 잃은 사람에게 경고하십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 버리느니라.”(눅14:34-35)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사실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부부가 병원의 정신과를 찾아와서 의사에게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이유는 부인이 입원해야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남편에게 이렇게 된 이유를 물었습니다. 남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의가 좋았습니다. 어느 날,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하다가 저에게 대드는 아내에게 화가 나서 무심코 던진 말 때문입니다. 제가 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너 같은 인간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아내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사람들로부터 “너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대우를 받게 된다면 살아갈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너는 정말 쓸모가 없구나.”라고 하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이건 죽을 맛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습니다.
제가 울릉도에서 살 때에 ‘저동’이라는 마을 뒷산을 깎아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흙이 황토 빛이 아니라 흰색이었습니다. 껍질처럼 나무가 자라는 윗부분만 흙이 조금 있을 뿐이었고 그 아래로는 모두가 하얀 색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하얗고 반짝이는 흙을 깨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흙을 석염(石鹽, 돌소금)이라고 했습니다. 산에서 캐내는 이 돌소금은 때로는 짠 맛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짠 맛이 나지 않는 돌소금은 흙으로도 사용할 수 없고, 건축자재로도 사용할 수도 없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의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야 합니다. 용서하고, 이해하고, 관용하고, 나누고, 돕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고, 자신을 다스리는 절제와 인내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맛을 내야 합니다. 영이 살아 있고 주님과의 교제로 인하여 풍성한 생명력이 있으면 이 맛이 새록새록 넘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교제가 뜸해지고 영의 생명이 빛을 잃어 가면 그리스도인의 맛도 잃어갑니다. 죽어가는 바다 생물은 짠물이 배이듯이 영의 생명을 잃어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의 죄의 맛과 어두움이 배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맛을 잃으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더 이상 너를 사용할 수 없다.”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아 한 군데 있습니다. 지옥의 불쏘시게 거리는 되겠군요.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 누가복음 14: 34-35 ♧♣♧♣♧
짠물인 바다 속의 생물들은 몸이 짤까요?
여러분이 바다 생선의 회를 먹을 때에 맛이 짜던가요?
바닷물은 분명히 짠데도 불구하고 생선은 짠 맛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생선 특유의 달고 상큼한 맛이 납니다. 그런데 죽은 생선에 간을 하기 위하여 소금을 뿌리면 생선은 짜게 됩니다. 짠 바닷물에서 사는 생선이 짜지 않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살아있기 때문이지요.
바다 생물들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짠물을 먹고 살지만 하나님께서 짠 맛을 걸러내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죽으면 그 능력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짜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죄악의 어두움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지만 어두움이 배어들지 않는 것은 영의 생명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상큼한 사랑과 빛을 내어 세상을 밝힙니다. 만일 영이 죽는다면 고스란히 죄의 어두움이 배어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두움이 배이게 되면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본연의 자세를 잃은 사람에게 경고하십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 버리느니라.”(눅14:34-35)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사실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부부가 병원의 정신과를 찾아와서 의사에게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이유는 부인이 입원해야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남편에게 이렇게 된 이유를 물었습니다. 남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의가 좋았습니다. 어느 날,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하다가 저에게 대드는 아내에게 화가 나서 무심코 던진 말 때문입니다. 제가 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너 같은 인간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아내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사람들로부터 “너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대우를 받게 된다면 살아갈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너는 정말 쓸모가 없구나.”라고 하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이건 죽을 맛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습니다.
제가 울릉도에서 살 때에 ‘저동’이라는 마을 뒷산을 깎아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흙이 황토 빛이 아니라 흰색이었습니다. 껍질처럼 나무가 자라는 윗부분만 흙이 조금 있을 뿐이었고 그 아래로는 모두가 하얀 색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하얗고 반짝이는 흙을 깨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흙을 석염(石鹽, 돌소금)이라고 했습니다. 산에서 캐내는 이 돌소금은 때로는 짠 맛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짠 맛이 나지 않는 돌소금은 흙으로도 사용할 수 없고, 건축자재로도 사용할 수도 없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의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야 합니다. 용서하고, 이해하고, 관용하고, 나누고, 돕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고, 자신을 다스리는 절제와 인내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맛을 내야 합니다. 영이 살아 있고 주님과의 교제로 인하여 풍성한 생명력이 있으면 이 맛이 새록새록 넘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교제가 뜸해지고 영의 생명이 빛을 잃어 가면 그리스도인의 맛도 잃어갑니다. 죽어가는 바다 생물은 짠물이 배이듯이 영의 생명을 잃어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의 죄의 맛과 어두움이 배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맛을 잃으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더 이상 너를 사용할 수 없다.”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아 한 군데 있습니다. 지옥의 불쏘시게 거리는 되겠군요.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