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사람
*** 빛의 사람 ***
*** 요한복음 3:19-21 ***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교회는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느냐?’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가장 먼저 ‘빛과 소금의 비유’를 생각하곤 했습니다. 빛과 소금의 비유를 생각하는 이유는 세상에서의 성도들의 역할을 빛과 소금의 역할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 원조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삶에서 본을 보이셨으며, 빛의 삶을 나타내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섬김의 본을 보이셨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과 뜻만을 행하셔서 순종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낮은 자리, 소외된 자리에서 봉사와 섬김을 친히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빛의 삶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빛을 싫어합니다. 요 3:19-21절에서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만 있습니다. 빛을 좋아하며 따르는 사람과 어둠을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현대 교회를 정신 나간 신데렐라에 비유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쓴 책의 표지에는 남루한 누더기를 걸친 한 소녀가 유리 구두 한 짝을 손에 쥐고 앉아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 신학자의 설명은 이러합니다. “잠시 후면, 왕자님과 결혼하여 왕비가 될 것인데, 이 소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소녀는 미래의 행복과 영광을 보장하는 유리 구두 한 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멍하니 구두 한 짝만 내려다보고 있는 처량한 모습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이미 이 지상에서 예수님의 신부가 되었으며, 그 혜택을 여러 면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미래의 엄청난 행복과 영광을 보장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이런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세속적인 삶에 도취하여, 세상과 함께 진흙탕에서 뒹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기억 상실증에 걸린 신데렐라와 같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교회는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적인 풍요와 육신적인 쾌락과 평안을 최고의 축복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이라는 조건은 달았지만, 정작 예수님이 하셨던 일과 걸어가셨던 고난의 길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둠을 좋아하고 따랐던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빛의 새 사람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빛의 사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겸손과 순종과 섬김과 봉사의 삶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행한 삶을 나타내려고 밝은 곳으로 나오게 됩니다. 세상의 어둠의 일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이지만, 빛의 사람의 일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합니다. 그래서 빛의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모습을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빛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종종 그리스도인을 등불에 비유합니다. 등은 그리스도인이며 빛을 밝히는 불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내게 있는 이 등불이 어둡지 않도록 관리해야 합니다.
- 마라나-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