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사랑 고픈 사람들(요일4:18-21)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8,316회 작성일 2001-08-04 00:31
Title 사랑 고픈 사람들 / Scripture 요일4:18-21 / Space 대복교회

*** 들어가는 말

방금 부른 찬송인 373장의 원제목은 Do you know the world is dying?입니다. 번역하면, ‘이 세상이 죽어가는 것을 당신은 아십니까?’ 라는 말입니다. 가사 내용을 되새겨 봅시다. “1.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소리 뿐일세. 2. 곳곳마다 번민함은 사랑 없는 연고요 측은하게 손을 펴고 사랑받기 원하네. 3. 어떤 사람 우상 앞에 복을 빌고 있으며 어떤 사람 자연 앞에 사랑 요구하도다. 4. 기갈 중에 있는 영혼 사랑받기 원하며 아이들도 소리 질러 사랑받기 원하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을 영적으로 조명하면서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을 울리는 내용입니다. 지금 이 세상이 온통 사랑 고픈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에 미치도록 매어달리는 것도 사랑으로 채워져야 할 자리가 비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허전한 빈 자리를 메우려고 재물에, 권력에, 지식에, 일에, 쾌락에, 육신적 사랑에, 사람들에게 분주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종말이 가까워지면 세상에 불법이 많이 행해질 것이며, 그로 인하여 사랑이 식어지겠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24:12절을 보십시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면 이 시대가 종말이 가까운 때니까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세상을 바라만 보아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인 영이 죽었던 빈 껍질만의 사람일 때,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삼으시고 영이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즉 성도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받은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세상에 세워진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붓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사랑 고픈 세상에 세워진 교회가 부어줄 사랑이 없습니다.

소설가 이동철 씨의 글 중에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논픽션이 있습니다. 그 소설 중간에 주위의 창녀들 때문에 교회에 지장이 있다고 경찰에 신고하여 창녀들을 쫓아버린 교회 이야기가 나옵니다. 교회 때문에 영업을 못하게 된 한 창녀가 교회에 항의를 합니다. 그 창녀는 술에 잔뜩 취해 알몸으로 교회 철문에 매달려 고함을 지릅니다. “이 자식들아! 우리가 너희보고 밥을 달라고 했니? 떡을 달라고 했니? 내 몸 팔아 내가 먹고 사는데 너희들이 웬 상관이냐? 우리들 다 먹여 살려라.”고 말입니다.

이 창녀의 처절한 몸부림은 사랑 고픈 사람들의 메마른 교회에 대한 항의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셨던 그 때에도 세리와 창녀, 종들과 병든 자들 등 사회로부터 소외당하여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눈먼 자, 문둥병자, 귀신들린 자, 거지 바디매오, 세리장 삭개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 일곱 귀신들렸던 마리아,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만난 창녀, 고아와 과부 등. 예수님께서는 세인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다가가셨고, 정죄보다는 연민의 정과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사랑에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한계가 있는 가 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 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그렇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물음에는 ‘아가페(대가없는 신적인 사랑)’의 사랑이었고, 베드로의 대답에는 ‘필레오(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으로 부모의 사랑, 친구간의 우정)’의 사랑이었습니다. 즉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일 뿐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신 사랑을 받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갈 수 없는 그런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에프스끼’의 작품인 ‘카라마조프의 형제’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귀부인이 교회의 장로님에게로 와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장로님, 나는 전 세계의 문둥병자의 발에 무릎을 꿇고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상처에 입 맞출 정도의 사랑이 마음에 가득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밤중 내가 잠자려 하고 있는데, 옆방에서 계속 울어대는 갓난아이가 있으면 나는 그 갓난아이를 목 졸라 죽이고만 싶습니다. 나의 사랑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에 나오는 부인과 똑 같은 경험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부인의 고백에 공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분명히 주님이 원하시는 그런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본문 20절에서 그런 사랑이 거짓 사랑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처럼 대가 없이 베푸는 진실한 사랑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우리가 주님처럼 똑 같은 사랑은 할 수 없겠지만, 주님의 사랑을 닮을 수는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닮을 수 있는 길은 주님의 사랑을 내 속에 충만하게 채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9절에서처럼 사랑의 시작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으로 충만할 때 나누고 베풀 수 있는 사랑도 충만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4:9-10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 안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는 길입니다.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즉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과 사랑을 베푸는 것은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요일4:12절을 봅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바로 이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이미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사랑을 서로 나누면 온전한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을 닮는 것입니다.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면 사해(死海)처럼 썩게 됩니다. 썩은 물에는 아무런 생명체도 살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도 흐르지 않고 혼자만의 것으로 고여 있으면 아무런 가치도 발휘할 수 없는 썩은 사랑이 됩니다. 그래서 잠언27:5절에서는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면책’이란 ‘서로 대면한 상태에서 꾸짖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표현되지 않는 숨겨진 사랑은 차라리 대면하여 꾸짖는 것보다 못한 것입니다. 사랑은 실천될 때에 진가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랑은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베풀어짐으로서 더욱 풍성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랑을 소유한 우리가 이 세상을 외면한다면 주님 말씀처럼 사랑은 급속하게 식어져 갈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사랑을 흐르게 합시다. 사랑이 메말라 갈라터지는 사람들의 가슴을 주님의 사랑으로 젖어들게 합시다. 가장 가까운 믿음의 식구들과 가족들로부터 시작합시다. 비록 서툰 몸짓이라 할지라도 흐르고 또 흐르면 아름답고 풍성한 사랑의 강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최고의 은사이며, 온전한 신앙을 이루게 합니다.
우리 대복교회가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그 사랑을 서로 나누고 베풂으로서 더욱 풍요로운 사랑의 삶을 이루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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