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설교문
복 주시는 하나님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9,443회 작성일 2008-08-18 13:38

*** 복 주시는 하나님 / 시편 67:1-7

** 들어가는 말

시편 67:1-7,(한글킹제임스역)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며 주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시기를 원하나이다. 셀라. 2 그리하여 주의 길이 땅 위에 알려지고 주의 구원이 모든 민족들 가운데 알려지게 하소서. 3 오 하나님이여, 백성들로 주를 찬양하게 하시며 온 백성으로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 4 오, 민족들이 즐거워하고 기쁨으로 노래하게 하소서. 이는 주께서 백성들을 의롭게 판단하시며 땅 위의 민족들을 통치하실 것이기 때문이니이다. 셀라. 5 오 하나님이여, 백성들로 주를 찬양하게 하시며 온 백성으로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 6 그때 땅이 그 소산을 낼 것이요, 하나님 곧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이다. 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이며, 땅의 모든 끝도 주를 두려워하리이다.”

‘다기망양’(多岐亡羊, 많을 다, 갈림길 기, 잃을 망, 양양)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여러 갈래의 길에 이르러 양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즉, ‘선택할 대상이 너무 여러 가지여서 어느 것을 선택할지 곤혹스럽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오늘의 사회가 이와 같지 않은가 싶습니다. 현대인들은 선택할 대상이 너무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시하는 대상이 너무나 많아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혼란스럽습니다. 어느 길을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현대인들은 삶의 진실한 목표를 잃어버리고 세상에 몸을 맡긴 채로 정처 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분명한 생의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3-14절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분명한 생의 목표를 밝히고 있습니다.

어떤 양봉업을 하는 사람이 꿀을 많이 채취할 방법을 연구하다가 좋은 길을 찾았습니다. 겨울이 없어서 사시사철 꽃이 피는 열대지역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꿀벌을 가지고 ‘남양 군도’로 이주를 했습니다. 그의 계산대로 이주한 첫 해에 많은 꿀을 채취했습니다. 양봉업자는  \"야, 이렇게 몇 해만 하면 큰 부자가 되겠어. 꽃 많겠다. 꿀 많겠다. 벌이 부지런하겠다. 얼마나 좋은가?!\" 라며 환상에 젖었습니다.
이주 2년째인 이듬해에는 벌들의 활동이 이상했습니다. 벌들이 꿀을 나르는 일을 부지런히 하지 않았습니다. 첫해의 절반 정도만 채취했습니다. 그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내년에는 괜찮겠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그런데 3년째에는 벌들이 전혀 일하지 않았고, 벌들이 떠나가 버려서 벌통이 텅 비어버렸습니다.

양봉업자가 왜 실패했겠습니까? 이유는 남양 군도에는 겨울이 없기 때문입니다. 양봉업자는 하나만 알고 더 중요한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겨울이 없고 항상 꽃과 꿀이 넉넉하다는 것은 꿀을 저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그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벌은 꿀을 모아야할 목적이 없어지자 수고롭게 일하지 않고, 풍성함에 빠져서 각자의 길로 흩어져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목표를 잃어버리면, 세상의 부귀영화에 빠져 제 멋대로 살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께서 이사야 22:13절에서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도다.”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목표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적절한 고난을 주기도 하십니다. 베드로전서 4:13-14절에서,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는 그 목표를 잊지 않도록 고난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고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부름의 상”이라고 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는 자녀로서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놀라운 영광의 복을 어떻게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찾아봅시다.

먼저, 본문의 배경과 내용을 살펴봅시다.

본시는 저자도 알려지지 않았고, 기록 배경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 시(詩)가 예로부터 ‘장막절’에 낭송되었으며, 유대인들 사이에서 ‘추수 감사 찬송’으로 불렸다는 것만 알려져 있습니다. 장막절은 유대인들이 반드시 지키는 삼 대 절기 중 하나입니다. 장막절이 되면 온 유대인들은 ‘초막’을 짓고 일주일 동안 그곳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초막을 짓고 살았던 광야 40년을 은혜 가운데 지나오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레23:33-43).

특히 본시는 제사장들에 의하여 선포되었던 축보기도의 문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민수기 6:23-27절을 봅시다.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을 사용한 이유는 복의 근원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즉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주체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경외하고 섬기며 따라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두 가지를 분명하게 깨닫고 실천해야 합니다.

첫째는 복의 근원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민족들이 가진 문화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미개한 민족이나, 개발도상국이나, 과학이 발달한 선진국을 막론하고 ‘나름대로의 복을 기원하는 종교와 문화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주역(周易)을 토대로 만들어진 ‘토정비결’이 조선시대부터 민간에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 이러한 미신도 없어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오히려 미신조차 과학의 혜택을 받아 더욱 기승을 부리는 현실입니다. 택일, 관상, 사주팔자, 궁합, 운세, 각종 점, 풍수지리 등. 오늘에 와서는 외국의 미신까지 들어와서 온통 난리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성도들조차 이런 관습을 벗어버리지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빨을 뽑으면 어디다 버려야 되고, 문지방을 밟지 않아야 하고, 이사할 때는 살이 끼지 않은 날을 잡아야 하고, 액땜을 해야 하고, 등등. 복을 구하는 눈물겨운 노력들이 종교와 문화 속에 녹아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이런 행위가 복을 주지는 못합니다. 복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45:21절에서는 “너희는 고하며 진술하고 또 피차 상의하여 보라. 이 일을 이전부터 보인자가 누구냐? 예로부터 고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에베소서 1:3절에서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라고 하십니다. 이는 복을 주시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이 되심을 가르치는 것입니까? 이유는 복을 바르게 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다급하게 되면 우상이나 다른 인생들에게 도움을 구하고, 은혜를 구하고, 복을 구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일시적인 것들이며 자신조차 구원하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즉 복을 구할 존재가 못 된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2:22절에서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하시며, 예레미야 10:3-5절에서는 “열방의 규례는 헛된 것이라. 그 위하는 것은 삼림에서 벤 나무요. 공장의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 그들이 은과 금으로 그것에 꾸미고 못과 장도리로 그것을 든든히 하여 요동치 않게 하나니, 그것이 갈린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에게 메임을 입느니라. 그것이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땅히 은혜를 구하고 복을 구하고 의지하고 경외해야 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확신한다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세상을 의지하고, 돈을 의지하고, 세상권세를 의지해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도 없지만 복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나훔 1:7절에서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고 하시며, 시편 37:5-6절에서는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을 아십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의뢰하고 구하는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성도에게 크고 작은 고난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가 세상으로 한눈팔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9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가장 첫 자리에 하나님을 모셔야 하며 진정으로 의지하고 복을 구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은총을 구해야 할 복의 근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복을 주시는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복과 은혜는 구한다고 다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 안에서 주어집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도한 대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시는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의미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본문1-2절을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 1절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기원하는 간구입니다. 2절은 앞 절의 간구가 응답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만방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복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복 주시는 뜻은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복은 자신만 잘 되기 위해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입어 선민이 된 것처럼, 이들은 이방 나라를 포함한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구원의 복을 받기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이들을 세상에 퍼뜨릴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2-3절에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만민에게 하나님을 알리시기 위하여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에베소서 3:8-9절에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것은 우리의 본향인 하나님 나라를 찾게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을 그 길로 인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본문 3-5절에 계속 모든 민족들로 하나님을 찬송케 하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2절입니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성도는 자신을 넘어, 이웃과 사회와 민족과 세계로 향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은혜를 자신만 가지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9:3절에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고백했으며, 디모데전서 5:8절에서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뜻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복을 구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이었으며,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지금 시인은 풍성한 가을 수확을 하면서, 바로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와 세계 선교 계획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성도들이 간구해야 할 것은 나 자신의 안전과 복을 간구하는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웃과 사회를 향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소원이자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복을 주시는 복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올바르게 구해야 합니다. 곧 성도는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게 위하여 하나님의 복을 구해야 합니다. 나 자신의 영달과 욕망을 위해서라면 하나님께서도 사양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 대복교회도 눈을 높이 들고, 마음을 활짝 열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놀라운 세계를 보아야 합니다. 자기 앞만 쳐다보면 다른 사람도 보이지 않고 넓은 세계도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만 바라보던 눈을 하나님을 향하여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보아야 합니다. 높이 오르는 사람이 멀리 보게 되고, 마음을 넓게 여는 사람이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으며 많은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편 81:10절에서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하십니다. “입을 넓게 연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넓게 열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열려진 넓은 마음에 충만한 은혜로 채우시고, 이렇게 채우심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9:8절에서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그 언젠가 다가올 추수 때를 위하여, 그 추수 때에 거둘 것이 있기 위하여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복음을 뿌리고, 사랑을 뿌리고, 기도를 뿌리고, 감사를 뿌리고, 인내를 뿌리고, 헌신을 뿌리고, 구제와 봉사를 뿌리는 등. 추수 때 수확을 기대하면서 아름다운 삶을 뿌립시다. 좋은 열매를 기대하면서 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마라나-타 -

Total 174건 12 페이지 RSS
설교모음 목록
No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9 설교문
하나님의 경영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 늘푸른
  • 02-26
  • 5471
8 설교문
어떻게 살아야 할꼬!
  • 늘푸른
  • 01-08
  • 5017
7 설교문
감사하는 자가 되라
  • 늘푸른
  • 11-09
  • 7086
6 설교문
위대한 성장의 비결
  • 늘푸른
  • 06-10
  • 5365
5 설교문
최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신앙의 모험
  • 늘푸른
  • 05-07
  • 8072
4 설교문
마지막 기회라면?
  • 늘푸른
  • 02-18
  • 6820
3 설교문
표현으로 배가되는 감사
  • 늘푸른
  • 11-17
  • 9586
2 설교문
이기적인 세상 속의 성도
  • 늘푸른
  • 11-03
  • 6622
설교문
복 주시는 하나님
  • 늘푸른
  • 08-18
  • 9444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