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나를 기념하라(고전11:23-32)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621회 작성일 2001-04-08 20:39
*들어가는 말

오늘은 예수님의 대속적인 고난을 기억하는 “사순절”의 절정에 이르는 <종려주일>이자, 고난 주간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이 오늘입니다. 때마침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전국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종려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이 날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며, 부활하시기 전까지의 기간을 <고난 주간>이라고 부릅니다. 통상적으로 이 주간 동안에 교회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생각하면서 성찬 예식을 갖게 됩니다. 우리도 보통 이날에 성찬식을 행했지만, 올해는 주님의 고난일인 금요일 저녁 모임에서 행하려고 합니다.

예수님 이후, 초기 기독교의 예배는 성찬뿐이었습니다. 오늘처럼 말씀 선포를 중심으로 한 예배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회당장의 말씀 낭독과 찬양이 주를 이루었고, 때때로 말씀에 대한 강론이 곁들여 졌으며, 모든 기도, 예언, 가르침은 성찬을 나누는 가운데 행해졌습니다. 곧 성찬 중심의 예배였습니다.
-ꁾ행2:42-47

사실, 교회의 중심축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속하는 것으로써 성찬의 의미가 되는 것이며, 세상의 죄에 대한 죽음과 영의 생명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이 세례와 성찬 두 예식은 기독교의 거룩한 예식인 성례입니다.

특히 오늘 말씀의 중심이 되는 성찬은 복과 징계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주님을 향하는 진실한 마음과 삶으로 행하는 성찬은 구원과 생명의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러나 진실하지 못한 마음과 삶으로 행하는 성찬은 스스로의 죄를 먹고 마시며, 징계가 따르는 두려운 것입니다.
-ꁾ본문25-32

성찬이 이처럼 진지하고도 중요한 것은 나를 위한 주님의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나라에 이르는 그 날까지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이 거룩한 희생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면, 성찬은 우리에게 있어서 어떤 것입니까?

성찬의 가장 첫 번째 의미는 죽음입니다.
본문26절을 읽어봅시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
우리가 성찬을 행할 때 나누는 떡과 포도주는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희생 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 희생은 죄로 인하여 이미 죽었던 우리 영과 죄 중에서 죽게 될 우리 육신의 죽음을 대신하여 바쳐진 제물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나 자신이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을 나를 대신하신 것으로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16을 보십시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의 희생에 대한 믿음과 죽음의 각오 없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오히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범하는 죄를 더하게 될 뿐입니다.
-ꁾ본문27절

성찬의 두 번째 의미는 부활입니다.
본문25절을 보십시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세우신 새로운 언약은 부활과 영생의 약속입니다. 요한복음6:38-40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이어서 53-55에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성찬은 하나님께서 죄악에 빠진 인간의 생명을 위하여 베푸신 은혜와 사랑의 식탁입니다. 이 생명은 세상의 죄로 물든 나 자신이 죽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예하는 것은 세상의 죄인 된 나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죽지 않을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찬이며 세례입니다.
-ꁾ롬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성찬’이라는 말을 영어로는 Eucharist라고 표현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좋은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음에 처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것을 이 성찬을 통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 된 사람은 이 성찬을 통하여 죽음의 강을 건너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육체적인 죽음은 부활 때까지 “잠시 동안 자는 것”입니다. 행7:60에서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반면에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는 성경 어디에서도 “잔다.”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이는 죄악 된 인간이 가야 하는 완전한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성도는 “죽는 것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찬은 슬픔의 예식이 아니라, 가장 큰 기쁨의 예식입니다.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은 아픔과 슬픔의 일이지만, 그로인하여 내가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가장 큰 기쁨인 것입니다.

성찬의 세 번째 의미는 지체됨입니다.
사도행전2:42-47에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광경은 성도들 간의 아름다운 식사와 교제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곧 초대교회의 성찬입니다. 쉽게 말해서, 성찬은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다만, 거룩한 식사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성도들이 이 성찬을 통하여 한 솥 밥을 먹는 것입니다. 한 솥 밥을 먹는다는 것은 가족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각 지체를 이룬 한 몸이며 한 가족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모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ꁾ고전12:12-13,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갈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친구’라는 말을 영어로 Companion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식사를 함께 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민족이든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친근함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찬을 나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식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언어가 다르고, 풍습이 다르고, 교파가 다르다 할지라도 성도는 성찬을 통하여 한 소망을 가진 한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성찬에는 이와 같이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와 성찬을 대하는 우리는 마음가짐이 깨끗하고, 정직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찬을 먹음으로써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전파해야 할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피지족’들의 생활을 연구한 선교사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주민들이 사는 동네 한 가운데에는 Killing Stone이라는 바위가 있었습니다. 이 바위는 단두대라는 사형도구와 역할이 같은 것입니다. 이 Killing Stone은 죽이는 바위로서, 피지족들에게는 아주 무서운 사형 방법의 하나였습니다.
피지족들은 죽을 죄를 지은 죄인을 이 큰 바위에 묶어놓고 머리를 짓눌러서 죽였으며, 바위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 참혹한 광경을 보여줌으로써 죄에 대한 경고를 대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온 선교사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해서 예수를 믿게 하고 세례를 줄 때, 그 죽이는 바위 앞에서 주었습니다. 선교사는 그 바위에 굳어 있는 피를 보게 하고, “자, 옛 사람들은 이렇게 죽습니다.”라고 하며, 세례의 의미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옛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죽었습니다. 지금 살아 있는 우리는 세상의 방법대로 살던 나 자신이 아닙니다. 지금의 나는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주님의 뜻과 지시를 받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며, 진정으로 ‘주님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아직 자신의 방법과 세상의 방법을 따르는 고집스러움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주님을 따르는 성도 여러분의 삶이 주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진실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삶이 온전히 주님의 소유가 되어 주님을 나타내는 영광된 삶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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