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호6:1-6)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8,051회 작성일 2001-04-08 20:35
*들어가는 말

어느 시골의 한 가정에서 딸이 가출을 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되자 소녀는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이 그리워서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고향집을 보려고 고향집으로 내려갔습니다. 밤중에 가보니 자신이 가꾸던 장미꽃도 보이고, 뛰어놀던 잔디밭도 보였습니다. 달밤에 자기 집을 바라보니 담장 옆 대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문 가까이 다가가서, “아버지-”라고 작은 소리로 불러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잠깐 사이에 아버지가 뛰어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는, “어디에 있다가 이제 오느냐? 네가 집을 나간 뒤 대문을 닫아보지 못했단다. 지금까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단다.”라고 하면서 덥석 안았습니다. 아버지는 혹시 밤중에 딸이 돌아올까 봐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와 흡사한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깊으신 관심과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황과 형편을 훤히 아시며,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ꁾ시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이런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즉,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알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6절에서,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안다”라는 말이 두 종류의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3절의 “알자”는 עꕊꖷ(yada, to know)로써, ‘관찰과 반성에 의해서 아는 것’, ‘경험에 의해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6절의 “아는 것”이라는 단어는 yada에서 유래된 말로써, תꘞꕒ(daath, knowledge)입니다. 그 의미는 단순히 ‘지식’,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두 단어의 의미를 종합하면, 하나님의 뜻이 보다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먼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지식적인 앎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성경을 읽는다든지, 설교를 듣는 것으로 채울 수가 있습니다.

다음 단계로, 경험과 깊은 묵상을 통해서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감성적인 앎입니다. 즉, 오랜 부부 생활 속에서 경험으로 체득하여 부부가 서로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것은 이론적인 앎이 아니라, 경험과 묵상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성숙한 지혜입니다. 이는 잠언의 주제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잠언9:10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했습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교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루어 가야 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는 무엇입니까?

1. 하나님께 알려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출33:17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름으로도 너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만큼 하나님과 모세와의 인격적인 교제가 깊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맺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면 어떠한 위치에 있어야 하겠습니까?

본문4절을 보십시오. 이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마음을 읽으시고 표현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아침 구름이나 이슬이 해가 떠오르면 사라지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이 조변석개(朝變夕改)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일정치 못하고, 변덕이 심한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한 번 약속한 것은 생명을 불사하며 지키는 사람, 환경과 여건에 굴하지 않는 심지가 곧은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욥이 그러했고, 그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그러했습니다.
-ꁾ사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비록 변심한 것 때문에 매를 맞았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니까 이제라도 돌아오라.’고 말입니다(본문5:15-6:3).

‘늦었다고 생각할 그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을 아십니까? 하나님께 인생의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변치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모든 것을 받아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이 일정치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가 없습니다(약1:6-8, 마6:24, 호10:2)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와 근심, 삶의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지 못하던 행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알려진 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ꁾ갈4:8-9,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그래서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때문입니다(요15:8-10).
다음으로, 우리가 이루어 가야 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는 무엇입니까?

2. 정결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본문2-3절을 봅시다. 이 말씀은 조속한 회복에 대한 약속을 사람의 입장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약속은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이 약속은 자신의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로 행실이 나쁜 <고멜>을 주셨습니다. 고멜은 남편을 떠나 이방 사내를 따라 갔습니다. 호세아는 보리를 싣고 가서 값을 치르고 고멜을 다시 찾아 왔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이나 거듭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표현하신 것으로써, 이스라엘로 깨닫고 돌이키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멜이 육신의 만족을 찾아 호세아를 떠나 이방 사람을 따라 가듯이, 이스라엘도 육신의 만족을 찾아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갔습니다. 호세아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하였느니라.”(호2: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이 잘못 가는 길을 보고 계시지만은 않으십니다. 곧, 잘못된 길을 가는 자녀의 앞길을 막으시며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호2:6)

이러한 하나님의 징계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삶으로 회복할 수 길은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뿐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이 길 외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많으며 심각한지를 아십니까?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두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한 여인은 자기는 큰 죄를 지은 죄인이라면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고, 또 한 여인은 자기는 일평생 이렇다 할 큰 죄는 짓지 않았지만, 자질구레한 잘못은 많다고 했습니다.
목사는 큰 죄를 지었다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들 수 있는 가장 큰 돌덩이를 가져오시오.” 그리고, 별 죄가 없다고 한 여인에게, “당신은 자디잔 돌멩이를 치마폭에 가득 주워 오시오.” 라고 했습니다. 한참 후에 두 여인은 목사가 시키는 대로하여, 한 여인은 커다란 바윗돌을 낑낑거리며 옮겨왔고, 다른 여인은 새알만한 잔돌을 치마폭 가득 주워 왔습니다. 그때, 목사는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그 돌멩이들을 제 자리에 갖다 놓고 오시오”라고 했습니다.
큰 바윗돌을 가져온 여자는 다시 낑낑거리며 바윗돌을 제 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어디서 가져온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알만한 잔돌을 치마폭에 가득히 주워 온 여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그때 “바로 그거요!”라고 목사가 소리쳤습니다. “하나님께 지은 죄도 바로 이런 것이요, 당신은 당신이 주워 온 돌이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듯이, 하루하루 이러저러한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께 죄책감 없이 일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많은 죄를 짓고도 회개 한번 하지 않았소. 그러나 이 여인은 큰 죄를 짓고 이렇게 통회하고 자복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총이 함께 하실 것이요.”

돌아오되 철저하게 돌아오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4:6, 5:4에서, “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없어 망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죄를 짓기에 용감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멸망에 처하게 됩니다. 아무리 主의 이름을 부르고 경건한 삶의 모습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경건의 능력이 없는 껍질뿐인 신자가 됩니다.

여호와를 아는 길은 앞서 서론에서 말씀드린 대로, 지식에서 새로워져야 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생활 속에서 체험하는 것입니다. 특히 “힘써 알라”는 말은 모든 것을 다 제쳐 두고, 여호와를 아는 데 줄달음치라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적당히 하라’는 유혹에 현혹되지 말고, 생명을 건 열정적인 신앙으로 오늘과 영원까지 행복의 길을 예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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