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현실을 넘어 불가능을 향한 도전
*** 현실을 넘어 불가능을 향한 도전 / 마가복음 5:25-34
마가복음 5:25-34,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 들어가는 말
여러분, ‘사선을 넘어서’라는 소설을 읽어보셨습니까?
이 소설은 일본의 성자라 불리는 ‘가가와 도요히꼬(하천풍언)’ 목사의 자서전적 소설입니다. 21살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 말기(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의 스승이자 그에게 세례를 준 ‘마야스’ 선교사가 와서 임종 예배를 드리고, 고별 찬송가까지 불렀습니다. 그러나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체험했습니다. 이 체험 후에 ‘죽음을 기다릴 것이 없다.’라고 선언하고는 빈민굴에 들어갔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72세까지 빈민 사역을 했으며, 후에는 노동운동을 하다가 수감 된 운동가들의 가족을 돌보는 사역을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음과 삶의 분기점에서, 인간은 애통이 터지며, 그 애통에서 육체 즉, 겉 사람이 깨어지며, 죽음의 선을 넘는다.”
‘사선(死線)’, 삶과 죽음의 경계선입니다. ‘이제는 끝이구나!’라는 탄식이 나오는 삶의 순간입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다가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아시아에서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가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후 1:8-9)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포기하는 그 자리에서 시작하십니다. 즉 우리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현실을 넘어 불가능을 향한 도전’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는 이렇게 인생의 끝을 경험하고 있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만일, 내가 이런 환경을 만난다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행하신 두 이적이 겹쳐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호숫가에 계실 때에 그 지역의 회당장인 야이로가 ‘자기 딸이 병들었으니 오셔서 고쳐달라.’라며 예수께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예수께서는 회당장을 따라 그의 집으로 가던 중에 혈루증을 앓는 한 여인 때문에 걸음을 멈추게 됩니다. 혈루증이란, 만성 출혈 병으로서 여성의 자궁에 이상이 생겨 피가 멎지 않는 병입니다. 이 병은 현대의학에서 암의 일종인 ‘고립 점막하 섬유종’(solitary submucous fibroids)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거의 불치병에 해당합니다. 이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몰래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 살짝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나을 것이다.’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즉시 12년 동안이나 흐르든 피가 멎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아시고 무리를 돌아보시면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아니 선생님, 지금 이 많은 사람이 밀고 당기는 것을 보시면서도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제자들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께서는 계속 무리를 둘러보셨습니다. 여인은 더 숨길 수 없음을 알고는 예수께 나아와 엎드려 사실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께서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며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사이에 본래 향하던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소식을 전했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십니까?”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혈루증 여인도, 회당장도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이들 두 사람은 현실의 암담함을 넘어 불가능에 도전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도전에 기적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의 삶에도 주님이 이루시는 기적의 선물을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먼저, 혈루병 여인을 봅시다. 오랜 병을 고치느라 재산도 다 허비했고, 이제는 희망조차 잃어버린 여인에게 복음이 들렸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사는 마을에 오셨다는 소식입니다. 여인에게 한 줄기 소망의 빛이 들어왔습니다. 여인은 망설임 없이 예수께로 다가갑니다.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 이 순간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러한 간절함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합니다. 또 한 사람,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딸의 위급한 상황에 혈루증 여인으로 인하여 지체되었을 때 얼마나 마음 졸였겠습니까? 급기야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절망감이 엄습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신 예수께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라고 하셨을 때, 회당장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회당장도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도전했습니다. 이 두 사람처럼, 암담한 현실을 넘는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이것이 쉬웠다면 모든 사람이 기적을 경험하겠지요. 이들의 불가능을 향한 믿음의 도전을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봅시다.
우리가 가끔 사용하는 한자 사자성어에 ‘이판사판(理判事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더는 물러날 곳이 없어 마지막 결정을 내리게 되는 상황’을 뜻합니다. 사실, 혈루병을 앓고 있는 여인의 심정이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규율과 자기 현실 사이에서 결단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5:2-3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증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되,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 유출병이 있는 사람은 진영에 들어올 수도 없었고, 다른 사람을 부정하게 하므로 사람들과 접촉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로 가까이 가려면 사람들의 틈을 헤집고 가야 하는 모험을 해야 했습니다. 예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하셨을 때, 선뜻 나서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인에게는 발각되어 매를 맞든지 욕을 먹든지 그것보다 더 중요한 목적은 자기의 불치병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모험을 택했습니다. 사람의 시선을 피하여 낮은 자세로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결국, 예수님의 옷자락 끝을 만졌습니다. 믿음으로 행한 도전은 즉시 놀라운 효과로 돌아왔습니다. 12년 동안이나 마르지 않고 흐르던 피가 즉시 멎었습니다. 이 능력은 예수께서 전혀 의도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을 고쳤습니다. 이처럼, 여인이 능력을 경험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예수께로 향한 확실한 믿음이었으며, 둘째는 현실의 벽을 뛰어넘는 믿음의 행동이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어떤 믿음의 요소가 있었겠습니까? 야이로는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한 딸의 생명을 위하여 예수께로 왔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방해꾼이 나타나서 조바심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혈루증 여인은 믿음이 확실했지만, 야이로의 믿음은 그가 했던 말을 보면, 뛰어난 믿음은 아닌 듯이 보입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이 말은 예수님의 권능을 잘 알지 못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비교해 보면,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이 자기 하인의 병을 위하여 예수님을 초청했을 때 그의 말입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예수께서 혈루증 여인의 일로 지체하는 사이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딸이 죽었음을 알렸습니다. 절망하는 야이로의 마음을 아신 예수께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을 걸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믿음이 약한 아이 부모를 위하여 죽은 소녀를 살리시는 현장을 보게 하셨습니다. 야이로의 상황처럼, 믿음의 길에 훼방꾼이 등장하고, 불가능한 현실을 마주하게 될지라도, 예수께로 향하는 믿음의 도전은 뜻을 이루게 됩니다.
※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호주에서 사역하던 선교사가 어떤 일을 계획하면서 2000만 원 정도의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일주일 동안 편지 50여 통을 쓰고, 국제전화도 하고 온갖 궁리를 다 하여 계산해 보았지만, 삼백만 원 정도 밖에 나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물론 기도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없어서 그 계획을 취소하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초조감과 좌절감 패배의식 같은 것으로 영적 저기압 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남편의 그 모습을 본 그의 부인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시나요?” 남편 선교사가 “그렇다.”고 했더니,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것도 확신하시는지요?” 이 물음에 ‘너는 정말 나를 믿느냐?’라고 번개처럼 스치는 주님의 책망이 있었습니다. 선교사는 사실 하나님 보다 그 많은 후원자들을 믿었던 자신을 회개하고 다시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사람의 행동과 생활 속의 모든 일은 그 사람의 생각에 따라 움직여지고 나타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생활로 나타나며,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적극적이고 생산적인 생활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실천적인 삶입니다. 앞의 이야기에서 호주 선교사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따라 계획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혈루증 여인은 병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전 재산을 잃고, 병은 더 깊어지는 절박한 상황이었지만, ‘예수께서 마을에 오셨다.’라는 소문을 듣고는 사회관습의 벽을 뛰어넘었습니다. 즉 여인은 모든 생각을 예수께 집중하여 믿음으로 행동하여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나타내야 할 신앙의 본입니다.
여러분, 경주마가 달리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경주마에겐 옆을 보지 못하도록 정면만 바라보도록 눈가리개를 씌웁니다. 이 눈가리개를 ‘블링커스(blinkers)’라고 합니다. 이는 다른 말이나 외부 자극에 의한 불안감이나 혼란을 줄이고, 경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 12:1-3절을 봅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1절 말씀에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경주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블링커스’입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것을 두리번거리느라 예수께로 향하는 집중력을 잃어버리면 현실의 벽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혈루증 여인이 자기 불치의 병을 고치려는 갈망으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았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예수께로 집중해야 합니다.
산소 용접기를 아시지요? 산소와 아세틸렌을 섞어서 불을 붙이면 뜨거운 불꽃이 일어납니다. 이 불꽃으로는 강철을 자르거나 녹여 붙일 수 없습니다. 산소와 아세틸린을 최적으로 조합하여 푸른 빛이 도는 강렬한 불꽃으로 만듭니다. 이 불꽃은 3,500도나 되어서 강철도 쉽게 녹여 절단하거나 붙일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현실을 뛰어넘는 기적을 일으키는 신앙도 기도와 말씀과 믿음으로 행하는 삶이 적절하게 합하여서 예수께로 향할 때 가능하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의 삶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면, 마치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능력의 삶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로마서 8:28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유부단하거나, 불신과 부정적인 생각으로 채워지면 아무런 능력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어렵고 힘들고 절박한 환경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십시오. 만일 혈루증 여인이 세상적인 조건이나 율법을 생각했더라면 결코 예수님을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 가까이 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혈루증 여인에게처럼 우리에게도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는 모든 일을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르며 성실하고 진실하게 최선을 다할 때 잡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11:1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도전하여 차지하는 자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최상의 기회는 지금임을 잊지 맙시다. 기회 지나가기 전에 주님을 붙잡고, 흔들림이 없는 믿음으로 결단하고 순종하여 환경을 능히 이기고 목적에 이르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