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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함과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318회 작성일 2025-02-09 17:15

*** 존귀함과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 로마서 2:1-8

 

로마서 2:1-8,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 들어가는 말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성향(性向, 성격에 따른 기질)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성향이 ‘고집형 아니면 화합형’ 어느 쪽이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고집(固執)이라는 말은 ‘옳고 그른 것을 떠나서 자기 생각을 바득바득 우기는 것’을 뜻합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고집을 ‘마음의 완악함’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죄를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성질을 아집(我執, 자신의 좁은 생각에 집착하여 자신만을 내세우는 것)이라고도 하며, 이것들은 교만한 마음의 성질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은 네 가지 만(慢, 게으를 만)을 조심해야 합니다. 4만(慢)은 이렇습니다. ‘①스스로 잘났다는 자만(自慢), ②남을 무시하는 오만(傲慢), ③남을 깔보고, 업신여기는 교만(驕慢), ④남에게 거들먹거리는 거만(倨慢)’입니다. 이렇게 네 가지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싫어하시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조건에 해당합니다. 잠언 18:12절에서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라고 하십니다. 16:18절에서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도 하십니다. 이렇게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즉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 삶의 기초는 하나님의 주인 되심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문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 말씀은 하나님 주인 되심을 부정하고 멸시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태도와 그에 따른 하나님의 경고를 말씀합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을 포함하는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로마는 로마제국의 수도입니다. 이 편지를 보낼 당시의 로마는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as, 옥타비아누스가 본명이며, B.C27년에 황제가 되어 41년간 통치)’에 의한 막강한 국력으로 지중해와 서유럽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주변 많은 식민지 사람들은 로마의 평화와 불멸을 믿고 로마에 귀속하는 것을 좋게 여겼습니다. 유대인들까지도 이렇게 ‘나는 로마인이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에는 많은 민족이 뒤섞여 있었으며, 유대인들도 상당히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약 4만 명). 예수께서는 이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직접 사도 바울을 보내셨습니다. 사도행전 23:11절입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사도 바울이 마지막 전도 사역지로 로마에서 순교하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이 로마서는 바울이 아직 로마에 가기 이전에 기록했는데,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과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특히, 1장에서는 이방인들의 더러운 삶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면서, 복음의 필요성을 우회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2장에서는 하나님을 부정하며 악을 일삼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깨우칩니다. 본문 5-6절입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이 말씀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유대인들까지도 하나님을 부정하고 악을 일삼는 타락한 삶을 경고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영생을 누리기 위하여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해야 한다.”라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 지금 내 삶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살펴야 합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세탁소에 갓 들어온 신입 옷걸이에게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던 헌 옷걸이가 말했습니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기를 바란다.” 그러자 신입 옷걸이가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습니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 거죠?” 헌 옷걸이가 말합니다. “아주 잠깐만 입혀진 옷이 자기 신분인 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야!”

 

이 비유적인 우화에서 주는 교훈은 ‘교만하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신분을 잊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드러내는 고집과 교만을 벗을 수 있는 길은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과 자신이 있는 정확한 자리를 안다면 결코, 교만하지도 고집스럽지도 않게 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서 얻은 것들이 자기 소유물인 양 지키고 의지하려 합니다. 즉 자기 명예와 지위, 부와 권력을 위하여 자기 생명까지도 내걸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이처럼 세상에 치우친 삶은 영적인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영적인 소경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렇게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행하는 죄에는 관심도 없지만, 다른 사람의 죄에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이것을 세상에서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괜찮지만, 남이 하면 안 되는)’이라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행실을 철저하게 살펴야 합니다. 그 심각성을 본문 1-3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뿐만 아니라, 마음의 경영 즉 마음의 생각과 계획까지도 살피시고 아십니다. 예수께서 중풍 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셨을 때, 사람들은 신성모독이라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생각을 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2:8절입니다.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지금, 말씀을 전하는 저나, 말씀은 듣는 여러분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도 아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만이 아는 은밀한 일들까지도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거나 죄악 된 모습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조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13-15절을 봅시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지금 세상에는 미혹의 영들, 즉 자기들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음을 아는 사탄의 활동이 미친 듯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 세계가 영적인 혼돈과 악한 영들의 활동이 강렬하여서 할 수만 있다면 택한 자들까지도 미혹하려 합니다. 우리나라 영의 세계도 너무도 문란하고 혼탁합니다. 기독교 방송이나 유튜브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목회자들,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이 공공연하게 주님을 대적하는 일들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단과 사이비들마저 드러내놓고 교회를 비난하고 미혹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혼탁한 시대를 사는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가르칩니다. 고린도전서 15:33-34절입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혹 여러분 주변에도 신앙적인 척하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여러분의 행실을 방종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과 적당하게 타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해도 구원받는 일에는 지장이 없다고 유혹합니다. 이렇게 악한 영들에 마음이 미혹되면, 신앙이 형식적으로 바뀌고, 영적인 열정도 기쁨도 사라집니다. 결국, 악한 동무들이 나의 영적인 선한 행실들을 더럽히고 죄에 빠지게 합니다. 빨리 깨닫고 벗어나지 않으면, 영적인 감각이 무뎌지고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되지 않도록 매일 매 순간 자기 모습을 진실하게 살펴야 합니다.

 

※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해야 합니다.

 

겨울철에 영국을 여행하던 여행자가 해안지방을 지나는 중에 바닷가에서 무엇인가를 모아서 수레에 싣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 사람은 죽은 갈매기들을 모아서 손수레에 싣고 있었습니다. 궁금한 여행자가 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왜 갈매기들이 그렇게 많이 죽었습니까?” 그러자 인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곳에는 여행객들이 많이 옵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갈매기에게 먹이를 던져줍니다. 갈매기들은 과자. 사탕 등 사람들이 주는 여러 가지를 받아먹게 되지요. 실은 그런 음식은 갈매기들에게는 좋은 음식이 아니라 오히려 해로운 음식들이랍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갈매기들이 그렇게 과자나 음식을 받아먹다 보니 입맛이 바뀌어 물고기나 자연의 먹이를 찾지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철이 지나고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어지면, 갈매기들은 좋은 먹이가 바닷속에 그렇게 많지만. 인간의 먹이만 기다리다가 결국 이처럼 굶어 죽는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이는 갈매기들이 자기 자리를 떠나서 헛된 것에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길들어서 자신이 갈매기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정체성을 잃은 갈매기는 사람이 주는 음식에 입맛이 길들고, 결국, 그 죽음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세상의 미혹에 맛을 들이고 집착하면, 하나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죽음의 덫에 빠져버립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쉽게 정체성을 잃고 사탄의 미혹에 빠지는 이유는,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했던 것처럼 사람의 의식주, 명예와 권세, 부귀영화로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천사처럼 다가옵니다. 앞서 읽었던 고린도후서 11:13-15절 말씀처럼,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여 그리스도인을 미혹합니다. 이것이 사탄이 사람을 유혹하는 수법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악한 영에 미혹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면,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은 무엇입니까? 본문 7절입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인내하면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주신 말씀에서처럼, 기쁨으로 거두기 위하여 끊임없이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을, 조금 더 폭넓게 보면, 내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이 또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있음을 생각하며 모든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오후 말씀에서 조금 더 하겠습니다.) 주변의 상황과 환경에 개의치 말고,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성실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존귀함과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삶에서 결단코 잊어서는 안 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회개(悔改)’입니다. 본문 5절에서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때에 큰 환난을 당하는 때에도 회개하지 않는 것 때문에 고통과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9:20-21절입니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종말의 그 큰 재앙을 당하고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우상을 따르는 자신의 고집대로 행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선한 사람도, 믿음이 좋은 사람도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과 교만한 사람의 차이가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지만,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사람은 자기 잘못을 깨달았을 때, 즉시 회개하고 돌이켜서 영광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못 할 수는 있지만 반드시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합니다. 비록 세상은 혼탁하지만, 매일 매 순간 자기 모습을 진실하게 살펴서 악한 세력에 미혹되지 않고, 끝까지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살피며 미혹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 주어진 일을 따라 선을 행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복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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