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뜨거운 가슴으로 삽시다.
*** 뜨거운 가슴으로 삽시다. / 누가복음 24:25-35
누가복음 24:25-35,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니라.”
※ 들어가는 말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리의 생각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존재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세상에 보내어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의지이며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고백하기를 “만세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라고, 오직 하나님의 의지로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보내시는 모든 사람에게 각자 해야 할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잠언 16:4절에서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세상에서 나타내야 할 제 역할이 있습니다. 이 역할은 각자에게 주어진 생애 동안 감당해야 합니다. 인생은 두 번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역할을 위하여 한 번뿐인 인생의 기회를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잘 사용해야 할 텐데, 어떻게 사용해야 하겠습니까?
유대인의 동화 중에 ‘하늘을 나는 말’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왕의 노여움을 사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왕에게 살려달라고 탄원을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 년의 여유를 주신다면 임금님이 가장 애지중지하는 말에게 하늘을 날도록 가르쳐 보이겠습니다.” 일 년이 지나도 말이 하늘을 날지 못한다면, 그때 가서 자기를 사형에 처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탄원은 받아들여져서 왕은 일 년 후에 사랑하는 말이 하늘을 날지 못한다면 그를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다른 죄수들이 어이없어하면서 물었습니다. “말이 어떻게 하늘을 난다는 말인가?”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일 년 이내에 왕이 죽을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그 말이 죽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일 년 이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래의 일을 누가 알겠나? 일 년 뒤에는 정말 말이 하늘을 날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훈련 시킨다고 말이 하늘을 날겠습니까?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이지만, 왕을 노엽게 한 사람은 일 년이라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기회를 사는 것입니다. 기회는 열정으로 잡고, 만들어야 합니다. 그 기회에 어떤 역사가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닮은 열정이라는 뜨거운 가슴을 부여받았습니다. 성경에는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리라.”라는 구절이 여러 곳에 나타납니다. 에스겔 39:25절에서는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사랑을 베풀지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 2:17) 예수께서도 가슴 뜨거운 열정으로 사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야 합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되신 후에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련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시자 따르던 제자들은 모든 소망이 다 끊어져 버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제대로 거리를 다니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장사 된 지 사흘이 지난 아침에, 어떤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두었던 무덤에 다녀와서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모든 것이 다 끝났다.’라는 좌절감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허탄한 마음을 안고 하나 둘씩 제 갈 길로 흩어져 갔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는 배반하여 예수님을 팔고 죄책감에 빠져 자살했고, 갈릴리가 고향인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나 잡으러 가련다.’(요 21:3)라며 일어서자, 다른 갈릴리 사람인 제자들과 또 다른 제자들이 합세하여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엠마오’가 고향인 두 제자도 ‘더는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허탈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본문 앞쪽 21절에서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라고 한 표현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예수님이 사형을 받아 죽음으로서 산산이 깨져버렸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다시 예전의 그 고통스러운 세상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이었습니다. 이 말씀의 반전은 본문 32절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 뜨거운 가슴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뜨거운 가슴이란, 마음이 불타오르고 열정이 솟아오르는 그런 뜨거움만은 아닙니다. 젊었을 때의 사랑하는 감정, 젊음의 패기는 오래가지도 않고 지속적이기도 힘듭니다. 본문 말씀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지금까지 부푼 꿈을 안고 따랐던 선생이신 예수께서 죽으셨기에 가슴은 온갖 실망과 좌절로 차가워졌습니다. 그런데, 길에서 만난 어떤 분의 말씀을 들었는데 그 차갑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이들 마음의 뜨거움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접촉되는 뜨거움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요한복음 14:27절을 봅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평안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내 안에 계실 때, 주님께서 나를 만지실 때, 그 접촉점에서 일어나는 평안이며 뜨거움입니다. 즉, 지금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려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접촉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 접촉점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떡을 떼기 전까지 그분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께서 떠나신 후에 말하기를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라고 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있어서의 접촉점은 ‘성경 말씀을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4:12-13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기도도 중요하고, 찬송도 중요하고, 다른 모든 경건의 일들이 중요하지만,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은 진리이자 신앙의 근본이며 초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에서 벗어나면 이단이 되고, 거짓이 됩니다. 그러므로 뜨거운 가슴은 하나님 진리의 말씀을 접촉하여 깨달을 때 일어나는 영적인 열정이며 뜨거움입니다.
누가복음 10:17-20절을 봅시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70명의 제자를 세우시고, 이들에게 둘씩 짝을 지어 마을을 돌며 복음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면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쳤습니다. 그리고는 예수께로 돌아와서 경과를 보고했습니다. 제자들은 신이 났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전한 복음에 사탄도 굴복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이시며 말씀이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 이름으로 선포되는 하나님 말씀은 사탄을 제어하며 병을 낫게 하고, 모든 어그러진 것이 회복되며, 차가웠던 마음이 뜨겁게 일어나게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이 뜨겁게 일어나게 하기 위하여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2절입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은, 말씀에 믿음을 더하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온전하게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17절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주님과의 접촉점이 되어 마음을 뜨겁게 일어나게 합니다. 이러한 뜨거운 마음, 열정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게 합니다.
※ 그러면, 왜 이렇게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야 합니까?
본문 33-35절입니다. “곧 그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니라.” 실망과 좌절감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난 후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사도들이 모여 있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된 것, 즉 회복의 길이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 말씀을 깨닫는 것, 즉 주님과 접촉된 사람들의 마음이 회복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길로 회복할 수 있는 길은 말씀 안에서 예수께로 향하는 열정을 가지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생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하고 선하게 살기 위하여 늘 긴장하며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의 입은 항상 굳게 닫혀 있었고, 죄를 멀리하고 선한 일에 열심하려고 온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그는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선해지려고 했습니다. 그 신학생이 어떤 기회에 성령의 은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성령 체험으로 진실한 신앙을 깨달은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좋군요! 지금까지 나의 삶은 싸움터였습니다. 열정을 가지고 선을 행하기 위하여 긴장하고 끊임없이 악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받아들였습니다!”
그 신학생은 이제 자신의 힘으로 억지로 거룩해지거나 선해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 안에서 자유롭게 되었고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저도 이런 경험이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자기 열정이나 노력으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주인으로 모시고,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것도 때가 있습니다. 영적인 갈급함이 일어날 때,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마음이 좌절될 때, 이때는 주님이 가까이 다가오시는 때입니다.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처럼 주님을 모셔 들이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가까이하십시오. 주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나아갈 길을 알게 하시고 인도십니다. 기회는 적극적으로 찾고 만들어야 합니다. 올해는 말씀을 가까이하여 주님이 이루시는 뜨거운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