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소신 있게 삽시다.
*** 소신 있게 삽시다. / 요한복음 14:16-21
요한복음 14:16-21,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들어가는 말
요즘 종종 듣는 말 중에 ‘소신 있다,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신(所信, 굳게 믿는바, 생각하는바)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확고한 믿음이나 주장’을 의미합니다. 이는 개인의 가치관, 생각, 경험 등에 근거하여 형성되며, ‘그 사람이 옳다고 믿는 것을 고수하고 행동하는 기준’이 됩니다. 소신은 개인의 독립성과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이며, 자기 생각과 믿음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예컨대, 취업 시장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지만, 본인은 자신의 열정과 소신을 따라 예술가, 창업가 등의 불안정한 직업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도 본인은 ‘소신 지원’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상 대화에서도 소신 발언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친구나 동료와의 대화에서 자기 생각과 믿음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하며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소신 발언이 이루어집니다. 소신과 비슷한 의미로 신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념(信念, 굳게 믿는 마음)은 개인이나 집단이 가지고 있는 깊이 뿌리 깊은 믿음이나 원칙을 의미합니다. 신념은 개인이나 집단의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목표를 규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칩니다. 소신은 개인의 생각과 경험에 근거한 확고한 믿음이나 주장이지만, 신념은 더 깊이 뿌리 깊은 믿음이나 원칙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소신이나 신념이 굳은 사람을 ‘주관이 뚜렷하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신과 신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당당하게 나타내는 것은 영적인 소신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8:38절입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영적 소신이 없는 사람의 결말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나는 어느 곳, 누구 앞에서나 당당하게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 본문 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봅시다.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심과 하나님 나라가 실존함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시면서 천국에 이르는 길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성부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언급하십니다. 이어지는 본문에서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 하나님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즉, 이제 곧 십자가에 달려 속죄 제물이 되셔야 할 예수께서 자신을 대신하여 성령님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육체적으로는 제자들을 떠나겠지만 그 자리에 성령께서 오셔서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은 사도 요한만 사용한 용어인데 ‘조력자’(공동번역-‘협조자’)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보혜사로 표현한 것은 예수님과 동등하신 또 다른 하나님을 뜻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사역이 단순히 성도들을 돕는 것만이 아닌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보증이십니다. 고린도후서 1:22절에서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본문 17절에서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별적 임재를 의미합니다. 즉 성령께서는 내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20절의 “그날”은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의미합니다. 즉 성령께서 임재하실 그 날(오순절)에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는 성령님의 임재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음을 의미합니다.
※ 소신 있게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문 16-17절을 봅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여러분은 생활 속에서 성령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경 말씀에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라고 하니까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합니까? 아직 성령님의 존재나 임재하심에 대하여 확실한 믿음이 없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습니다. 이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는지를 확신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래서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를 알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3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을 진정으로 ‘나의 주인’ 즉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이 고백을 하신다면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오시는 때가 언제입니까?
사도행전 2:38-39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이 말씀대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는 때는 ‘내가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은 때’입니다. 세례가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세례는 죄를 씻고 거듭났다는 표시입니다. 회개란 내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행하였던 모든 행위를 예수께 아뢰고 용서를 구하며, 그 불신의 길에서 떠나 예수님을 나를 구원하신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양자로 삼아주시고, 그 보증으로 성령님을 보내 주십니다. 요한일서 1: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사실은 우리 육신이 생명을 다하는 마지막 호흡할 때까지 확실하게 잡고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3:14절입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소신 있게 산다는 것은, 어떤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임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이 말씀처럼 하나님의 자녀 된 명분은 이 육신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지켜야 합니다. 이삭의 장남인 에서처럼, 배고프다고 한 그릇 팥죽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리고, 결국 장자의 복을 빼앗겼던 것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즉 이 세상에서 육신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그리스도인임을 숨기거나, 믿음을 버리는 소신 없는 행위는 하나님께 버림받게 됩니다. 마가복음 8:38절입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정말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소신이 생활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어느 대 기업에 중역으로 계시는 신앙 깊은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한 날은 새벽 기도 후에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회장이 불교 신자인데 공장을 새로 신축해서 준공식을 하는 날 고사를 지내는데, 자신이 회장과 함께 절을 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교회 중직 자로서 고사를 지내는 것도 절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고, 또 절을 하지 않으면 회장의 뜻을 어기는 일이 되어서 회사를 그만두어야 마땅하다.’라는 생각으로 고민했습니다. 장로님은 목사님과 함께 기도하면서 갈라디아서 1:10절의 말씀을 통하여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다음 날, 장로님은 회장실을 방문하여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회사 대표 중역의 갑작스러운 사직서를 보면서, 회장이 사임하려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장로님은 “저는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맡은 사람입니다. 저는 사장님을 존경하고 또 모든 일에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러나 고사를 지내며 절하는 것은 신앙 양심에 허락되지 않고, 회장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함을 죄송하게 생각하여 사임하려고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회장은 장로님의 손을 잡으면서 “당신처럼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이 내게 필요하오, 내가 대신 두 번 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오.”라며 사직서를 반려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소신입니다. 간증 속의 장로님처럼, 생활 속에서 자신에게 닥친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때, 하나님의 뜻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신 있는 삶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내가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신을 나타내면, 주님께서 내 삶에 들어오셔서 능력의 삶을 이루게 하십니다.
※ 내 생활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봅시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통장에만 넣어두면 아무런 능력도 가치도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무리 지혜롭고 능력 있고 재능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보혜사 성령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16-17절을 다시 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의 차이를, 성령님의 임재하심에 있다고 하십니다. 즉 교회 생활을 하지만, 성령님의 임재하심이 없는 사람은 그냥 세상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인 안에 계시는 성령이십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내 삶을 주도하시도록 주인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지만 여전히 내가 주인이 되어 있다면,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좋은 예를 보여주셨습니다.
마가복음 4:35-41절에는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 중에서 ‘바람과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이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 지역에서 갈릴리 동쪽 광야 지역으로 가시려고 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배의 뒤쪽에서 잠이 드셨습니다. 그 사이 갈릴리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나서 노를 젓기도 힘들고 더욱이 배 안에 물까지 들어찼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로 잔뼈가 굵은 제자들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일어나신 예수님은 바람과 풍랑을 향하여 “잠잠하라. 고요하라.”라고 명령하셨고, 즉시 바람도 그치고 물결도 잔잔해졌습니다. 이 사건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예수님이 함께 하셔도 예수께 맡기지 않으면, 여전히 인생이 힘이 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일하시도록 나를 맡기면 세상의 어떤 풍랑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안에 성령께서 계시지만 여전히 내가 주인이 되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진행한다면 삶의 풍랑으로 고생하게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내 생활에 역사하시도록 삶을 맡겨야 합니다. 어떻게 맡깁니까? 기도할 수 있잖아요.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기도로 하나님께 자기 일을 아뢰고 인도하시도록 맡기십시오. 잠언 16:3절에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라고 하시며, 요한복음 15:7절에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하십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내 형편과 처지를 그 누구보다, 심지어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8:26-3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이처럼, 우리 삶에서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신을 지키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사람들의 행동이 조급하여지고, 자기 뜻과 쾌락을 따라가는 세상이지만,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한 소신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 길입니다. 이같이 우리 마음을 지키는 생활로 삶의 순간 순간을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능력을 나타내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