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나는 지금 만족합니까?
*** 나는 지금 만족합니까? / 고린도후서 3:1-6
고린도후서 3:1-6, “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 들어가는 말
사람들은 각자 자기 행복을 추구합니다. 행복하지 않다면 그 어떤 것도 별 의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행복보다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만족입니다. 큰 행복이라도 만족하지 못하면 불행이고, 아주 작은 행복도 만족하면 큰 행복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자기 삶에 만족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전도서 1:8절에서 솔로몬은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 하는도다.”라고 하며, 5:10절에서는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신의 삶이 만족스러운가요? 만족스럽지 않다면 어떤 이유입니까?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 자신만의 만족(滿足)을 추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실 만족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만족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삶을 경영하심을 확신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족은 개인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에 따라 모두 다릅니다. 이 시간의 말씀을 통하여 만족의 중요성과 내가 추구하는 만족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을 포함하는 고린도후서는 앞서 고린도전서를 에베소에서 써 보낸 후, 두 번째로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입니다. 바울은 첫 번째 편지를 보낸 후, 디도를 보내어 고린도 교회의 상태를 알아보게 하고, 자신은 드로아에서(2:13) 마케도니아로 건너갔습니다. 그곳에서 디도를 만나(7:5), 그 경과 보고를 받았습니다. 디도가 전한 소식 중에서 기뻐할 일은, 첫 번째 편지에 의하여 그들이 회개하고(5:9), 또 바울을 간절히 사모한다는 것(7:7) 등이었습니다. 동시에 슬퍼할 일은 고린도 중에 반(反) 바울주의자가 세력을 얻어, 바울에 대한 온갖 비난을 퍼뜨리며, 그의 사도직과 그의 동기까지 의심하며(1:17), 그의 탐욕을 비난하는 것입니다(12:16), 심지어 바울의 말과 태도까지 문제 삼고(10:1) 있었습니다. 이렇게 희비(喜悲)가 엇갈리는 소식을 접한 바울은 두 번째 편지인 고린도후서를 썼습니다. 그래서 본 서신, 특히 12:19-21절에는 바울의 감정이 드러나면서, 그의 편지 중에서 가장 강한 개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배경을 가진 내용에는,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그들의 죄를 회개하게 하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앞으로 고린도에 갈 때, 서로 기쁨으로 볼 수 있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다른 목적으로는 어려움을 겪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마게도냐 교회가 자신들도 어려우면서 기쁘게 헌금한 것을 상세하게 전하면서 고린도 교회도 동참할 것을 독려합니다. 9:5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는 고린도 교회도 헌금에 동참하게 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만족은 어떤 의미입니까?
미국의 작가인 ‘게일 훼일’은 ‘통로를 찾는 사람들’이란 글에서 ‘참 만족을 갖고 사는 사람들의 조건’에 관하여 여덟 가지로 말했습니다. 삶과 뜻에 분명한 방향을 가진 사람, 허무와 실망에 매이지 않는 사람, 앞날의 계획을 믿음과 용기로 성취하는 사람, 누군가를 무척 사랑하는 사람, 신뢰할 친구가 많은 사람, 낙천적이고 비밀이 없는 사람, 자기비평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 큰 두려움이 없는 사람.
게일 훼일이 제시한 만족에 관한 조건은 세상에서의 만족을 위한 조건들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삶의 자세만으로는 진정한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본문 5절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행복을 차지할 수 있는 만족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6-8절입니다. “그러나 지족(知足)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현실에 만족하라.’라는 뜻입니다. 현실에 대한 만족은 ‘지금 내게 주신 환경과 소유와 모든 삶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섭리하심을 믿을 때’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본문의 “만족”이라는 단어는 ὶκανός(이카노스)인데, 이 단어는 ‘도착하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면에서 사람들이 흡족해할 만한 요소를 갖추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러 면에서 흡족해할 만한 요소를 갖춘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겠지요? 비록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불만족이 자기 삶에 쌓이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불만을 나타내고, 화를 내며, 염려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흡족해할 만한 모든 요소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만족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라는 말은,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절대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15:10절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봅시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나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며, 복음 사역의 일꾼이 되는 것도 역시 한 개인의 계획이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만족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만족은 어떤 것입니까?
사람들은 자신이 만족할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이 처한 환경을 탓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환경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만족은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것을 추구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의 행동이 그 사람만의 독특한 삶의 향기가 됩니다. 물론 이 향기는 냄새로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향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는 착하다” 또는 “선한 사람이다”, “악한 사람이다.”, “부지런하다”, “게으르다”, “타고난 일꾼이다”, “눈치꾼이다” 등등. 이러한 인생의 향취는 그 사람의 삶의 만족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만족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표징은 행복감과 기쁨과 감사입니다. 이처럼 만족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향취가 사람을 감동하게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본문 2-3절입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즉 고린도교회 성도 자신들이 바울의 진정한 편지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는 편지라는 뜻입니다. 편지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내가 사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도 있고, 자기들과 똑같은 세상 사람을 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의 뜻을 세상에 나타내면 사람들은 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만족하지 못하고, 염려와 불만으로 가득하다면,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를 것 없는 세상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만족은 자기 생명과 삶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좀 쉽게 풀어봅시다. ‘내가 행복을 느끼는 만족의 조건이 무엇이냐?’를 살펴보면 됩니다. 여러분의 만족 조건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가진 조건과 똑같지는 않습니까? 성경에서도 가룟 유다 같은 제자는 그의 만족 조건이 돈에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초기에는 높은 자리가 만족의 우선순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10절에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의 좋은 동역자였던 데마도 만족의 조건을 하나님께 두지 못하여, 결국 세상으로 돌아가 버렸던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아마 더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찬송으로, 복음송으로, 기도로 ‘주님만을 사랑한다.’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돈이나 물질, 사람, 권력 등을 더 의지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무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만족의 조건을 하나님께 두지 않고 세상에 두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세상이 자기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5-9절을 봅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내가 추구하는 행복과 만족의 조건이 무엇이냐에 따라 세상이 주인일 수도 있고, 하나님이 주인일 수도 있습니다.
평양 산정현교회의 '조만식' 장로에 관해 일화가 많습니다.
조만식 장로는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할 때 시무장로이기도 했습니다. 조만식 장로의 검소함은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무명으로 만든 두루마기의 옷고름을 절약하려고 단추를 달아 입었고, 모자도 대를 이어 쓸 수 있도록 말총으로 튼튼히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한 번은 조만식 장로가 오산학교의 교장으로 있을 때, 어느 졸업식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학교의 설립자인 이승훈 선생이 조만식 장로의 초라한 모습을 내빈들에게 보이기가 거북하여 ‘졸업식장에서만이라도 예복을 입어라.’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때, 조만식 장로는 “교장 노릇을 못하면 못했지 없는 것을 어떻게 입겠습니까?”라고 하면서 평상시의 차림새를 고집했다고 합니다.
또 한 번은 중학교를 졸업한 아들이 늘 신고 싶었던 구두를 사오자 그것을 가위로 잘라버리면서 “공부를 위해서는 아까울 것이 없으나 신분에 맞지 않는 사치는 용서할 수 없다.”라고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조만식 장로님은 무작정 구두쇠로 산 것이 아니라, 자기 신분과 분수에 걸맞은 삶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사역이나 믿음의 분량대로 은혜를 베푸십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군사들은 전쟁에 동원되어 있었지만, 자기는 충성된 신하의 아내를 차지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하 12:7-9절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하나님께서는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이라고 하십니다. 즉,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 안에 있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안에서 만족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지금 내게 주어진 상황이나 환경, 물질이 부족하다고 여겨지면 어떻게 합니까? 야고보서 1:5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그리고 빌립보서 4:6절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 말씀처럼,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구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은혜의 분량대로 채워주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으로 만족하려고 추구한다면, 결단코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만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만족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삶에서 만족할 때, 우리 마음은 평안과 기쁨으로 가득하게 되며, 진정한 감사를 나타내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는 편지가 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의 뜻을 세상에 나타내면, 사람들은 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세상의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고, 매일 주어지는 생명과 삶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자녀 된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렇게 준비된 삶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지혜로운 주님의 지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