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그리스도인 - 주님 마음으로 사는 사람
*** 그리스도인 - 주님 마음으로 사는 사람 / 누가복음 5:27-35
누가복음 5:27-35,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 들어가는 말
지난주에 이어서 이 시간에도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에 관한 말씀입니다. 중국 전통 산문인 ‘상서(尙書)’ ‘주관(周官)’의 공씨 전에 나오는 글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귀불여교기이교자래(貴不與驕期而驕自來) 부불여치기이치자래(富不與侈期而侈自來)” ‘권세(權勢)는 교만과 약속하지 않지만, 교만이 스스로 찾아오고, 부유는 사치와 약속하지 않지만, 사치가 스스로 찾아온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교만이 사람에게 어떻게 생기는지를 보여줍니다. ‘권세를 가지게 되면 교만을 생각하지 않아도 교만이 스스로 다가온다.’라고 했습니다. 권세란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마음 자세입니다. 고집(固執) 혹은 아집(我執)은 ‘자기중심의 좁은 생각에 집착하여 자신만을 내세워 버티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만과 고집은 사촌 간이며, 주님의 마음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자세입니다. 반면에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는 겸손과 청종입니다. 지난주에 겸손에 관한 말씀을 했고, 이 시간에는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따르는 청종(聽從)에 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사역 초기에 제자들을 부르시는 과정입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로 살아가는 형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으며, 본문에는 세관에서 일하는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의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 잔치에는 레위의 직장동료들인 세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세리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죄인’으로 취급되어 함께 있는 것조차 꺼리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세리들과 함께 있는 것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보고는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라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도 비교하면서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라며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잣대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제자들을 평가했습니다. 반면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하는 사역의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옳고 그름의 잣대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법과 기준이었습니다. 이처럼, 공공성이 없는 기준을 ‘편견(偏見)’이라고 합니다. 즉 한쪽으로 치우친 편파적인 견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편견이 없지만, 개인의 신앙이나 신앙생활에는 많은 편견이 있습니다. 편견은 편견적인 신앙을 갖게 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는 이런 편견들이 세상이나 교회에 만연해 있으면서, 오히려 영혼이 잠드는 안일한 삶을 부추깁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라며, 때에 합당한 신앙의 자세를 말씀하십니다.
※ 주님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에는 ‘토기장이’라는 말이 종종 등장합니다. 이 말이 등장하는 이유는 주로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로마서 9:21절을 봅시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이 말씀의 원조 격인 예레미야 18:2-6절입니다.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주리라 하시기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로마서 말씀은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며, 예레미야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삽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권한 아래에서 사는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마음’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맹주산(狗猛酒酸, ‘개가 사나우면 술이 시어진다.’)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한 나라에 간신배가 있으면 어진 신하가 모이지 않는다.’ 혹은 ‘경영술이 좋지 않으면 발전이나 진보가 없어 어려움이 따른다.’라는 것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이 말이 생기게 된 배경은 춘추전국시대 말기의 한(韓)나라 출신인 ‘한비자(韓非子, BC 280~233)’가 쓴 글에 있습니다. 한비자는 한나라가 갈수록 약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매우 걱정되어 여러 차례 한 왕에게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모략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한비자는 이런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춘추시대 송(宋)나라에 술을 만들어 파는 장씨(莊氏)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술을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고 손님들에게도 공손히 대접했으며, 항상 양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팔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술집임을 알리는 깃발까지 높이 세워 두었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집보다 술이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는 마을 어른인 ‘양천’에게 그 이유에 대하여 지혜를 구했습니다. 양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간단한 문제인데, 바로 당신 집의 개가 너무 사납기 때문이네.” 장씨는 술장사와 개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양천은 “사나운 개가 술 사러 오는 사람들을 보고 짖어 대서, 특히 아이들이 심부름을 왔다가 놀라 달아나는 판인데, 누가 감히 술을 사러 오겠는가? 이 때문에 술은 시어져 버리고 팔리지 않는 것이네”
결국, 양천의 말은 개를 없애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서 구맹주산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구맹주산이라는 말을 우리의 신앙에 접목해본다면, ‘자신의 좋지 않은 습관과 관점에 빠져 안주하게 되면, 바른 신앙이 가까이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습관은 사자처럼 무섭습니다. 습관을 이겨내고 바꾼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습관은 잘못된 편견마저 옳은 것처럼 여기게 만들고, 그 틀 안에서 안일하도록 만듭니다. 본문을 비롯하여 성경에 수없이 등장하는 유대인들, 사두개인,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율법사들. 이들의 편견은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만든 율법에 빠져 메시아이신 예수님마저 십자가에 못 박게 했습니다. 편견을 깨지 않으면 진리도, 올바른 신앙도 결코 가까이할 수가 없습니다. 이 어려움이 어느 정도인지 예레미야 13: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구스 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본문에서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편견으로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고, 예수님과 제자들마저 정죄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먼저, 내가 가진 교만과 고집으로 세운 편견을 버림으로 시작됩니다. 즉 주님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공평과 정의로움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잣대로 세리를 정죄했으며, 세리와 함께 있는 사람들까지도 정죄하고 교류를 막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7:24절에서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주의해야 할 내용입니다. 주의해야 할 이유를 야고보서 2:1-4절에서 밝힙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9절입니다.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이것이 위험한 편견입니다. 이 편견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경계목록 1호로 올린 이유도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이 빠져있으면서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며,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고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31-32절에서 편견을 깨뜨리시고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우리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 과거의 경험이나 지식을 의지하는 것의 위험성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 그 중요성을 본문 이후의 36-39절에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라는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우리의 신앙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따라야 합니다. 다만,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생활 습관에 머물려고 하는, 즉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삶의 태도가 걸림돌이 됩니다. 이를 삶의 관성 법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나온 삶에 매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누가복음 9:6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그래서 사도 바울도 자신의 삶을 빌립보서 3:13-14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옛 삶의 자리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부름의 상을 향하여 매일 새롭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요즘 종종 회자(膾炙)되는 ‘시계제로(視界ZERO)’라는 말이 있습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합성 신조어입니다. 이 말은 ‘항해하는 선박이나 항공기 등이 안개나 구름 등의 환경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시야가 가려져서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최근에는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세상살이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비유해서 시계제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세상만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도 지금은 시계제로라고 할 만큼 혼탁한 오리무중입니다. 이럴 때는 신앙의 근본이신 예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도록 우리 마음에 하나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청종(聽從)입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돌아가면, 말씀이 우리 발의 등불이 되어 우리 걸음을 올바르게 인도하십니다. 이 인도하심을 따라 부름의 상을 위하여 편견 없는 공평과 정직한 삶으로 어둠을 밝히는 빛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