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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빛의 사람들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701회 작성일 2023-12-24 15:02

*** 빛과 빛의 사람들 / 요한복음 3:16-21

 

요한복음 3:16-21,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 들어가는 말

 

기독교 역사에서 큰 사건들을 이야기한다면, 성경이 정경으로 채택되었던 90년의 얌니아 회의(구약 정경화), 397년의 카르타고 회의(신약 정경화), 수도원 운동, 종교개혁 같은 기념비적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성령 부흥 운동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때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였습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알게 되면서 부흥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 부흥 운동 중에서 기독교 역사에 남은 큰 사건은, 1904년 영국 ‘웨일즈의 대 부흥’이었습니다. 이 부흥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이 부흥의 시작은 작은 교회의 어느 여성도의 회개를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여 성도는 주기도문을 하다가 그것을 끝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이 대목에 이르러 더는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미워하고 있는 같은 교회의 한 형제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기도를 중단했습니다. 부질없는 봉사도 중단했습니다. 예배까지도 중단했습니다. 그리고는 너무나 미워서 오랫동안 찾아보지 않았던 형제를 찾아갔습니다. 그를 만난 여성도는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자신의 잘못이며 책임이다.”라고 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못했던 내 죄를 회개합니다.”라며 회개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이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 속에는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시작된 회개를 통한 부흥 운동이 ‘웨일즈’라는 도시 전체로 퍼졌습니다. 이 부흥 운동을 경험한 ‘하디’와 ‘존 스톤’선교사가 1906년 평양을 방문해서 웨일즈 부흥 운동과 원산 부흥 운동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1907년 1월 6일부터 겨울 사경회를 갖기로 하고, 전날 밤 ‘장대현 교회’에 1500여명이 모여 특별 집회를 했습니다. 강사였던 ‘길선주’ 장로(한국 최초 목사 7인 중 한 명)의 공개 회개가 불씨가 되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평양 대 부흥 운동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소개한 이유는 기독교의 역사가 빛의 역사임을 알기 위함입니다. 즉 회개 운동이 부흥 운동의 시작이었는데, 회개는 어둠을 걷어내고 빛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이 빛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은 성탄절 하루 전인데, 성탄절은 예수께서 죄악으로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날이며,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빛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에베소서 5:8-9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예수님의 오심을 기뻐하며, 빛의 사람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 본문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세상 사람들도 아는 가장 유명한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은 바리새인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니고데모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고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크게 감동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볼 생각으로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밤중에 찾아왔습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 중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에 관하여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연의 이치와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사실을 곁들이시면서 니고데모에게 복음의 진수를 가르치셨습니다. 특히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과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삶의 형태까지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복음과 역사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본문 16-17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진리를 알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진리는 갈급하게 찾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신분과 명예와 권력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1:12절에서,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라고 하셨고, 7:7-8절에서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값진 진주의 비유’나 ‘밭에 숨겨진 보화의 비유’를 통하여 천국은 적극적으로 찾는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구약에서도 예레미야 33:3절에서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라고 하셨으며, 잠언 8:17절에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이르게 됩니다.

 

※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올해도 어김없이 성탄절 장식을 가장 먼저 한 곳은 백화점이나 상가 거리였습니다. 심지어 술집에도 Marry Christmas라고 붙여놓고 장식해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도 않는 세상 사람들은 왜 성탄절을 기뻐하고 기다리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위기를 좋아하고 즐기는 것입니다. 저는 ‘행여 우리 그리스도인들마저 이런 분위기를 즐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의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오심을 기뻐하는 이유는 ‘주님이 나를 구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죄로 죽었던 나를 살려주시려고, 내 죄의 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레위기 17:11절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이 말씀처럼, 나의 죄를 속하려면 생명을 내놓아야 하는데, 예수께서 나 대신 생명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14:24절에서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구원의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를 통하여 이루셨습니다. 이렇게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예수님의 오심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던 것처럼, 마지막 때는 심판하시는 주로 다시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1:11절입니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첫 번 오심은 본문 17절 말씀대로 구원을 위한 것이었지만, 다시 오심은 심판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심을 마냥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부끄럽지 않게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주님을 만날 날이 언제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종말에 주님이 오시겠지만, 역사의 종말이 아니더라도 나 개인의 종말이 언제든지 이를 수 있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오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옵니다. 그리고 어떻게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어떤 분이 한자의 ‘죽을 사(死)’자를 풀이한 것을 보았습니다. ‘한 일(一)’자에 ‘저녁 석(夕)’에 ‘비수 비(匕)’자가 합해진 글자라는 것입니다. 해석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느닷없이 비수처럼 찾아오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라는 것입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비수처럼 찾아오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 인간은 예외 없이 비수처럼 찾아오는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믿든지 믿지 않든지 영원한 심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절입니다. “한 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이 죽음 후에 있게 되는 심판입니다. 이 심판에도 부끄럽지 않도록 준비된 삶이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 우리가 빛의 사람이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교회는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느냐?’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가장 먼저 ‘빛과 소금의 비유’를 생각하곤 했습니다. 빛과 소금의 비유를 생각하는 이유는 세상에서의 성도들의 역할을 빛과 소금의 역할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 원조는 본문 말씀처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삶에서 본을 보이셨으며, 빛의 삶을 나타내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섬김의 본을 보이셨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과 뜻만을 행하셔서 순종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낮은 자리, 소외된 자리에서 봉사와 섬김을 친히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빛의 삶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빛을 싫어합니다. 본문 19-21절에서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만 있습니다. 빛을 좋아하며 따르는 사람과 어둠을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현대 교회를 정신 나간 신데렐라에 비유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쓴 책의 표지에는 남루한 누더기를 걸친 한 소녀가 유리 구두 한 짝을 손에 쥐고 앉아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 신학자의 설명은 이러합니다. “잠시 후면, 왕자님과 결혼하여 왕비가 될 것인데, 이 소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소녀는 미래의 행복과 영광을 보장하는 유리 구두 한 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멍하니 구두 한 짝만 내려다보고 있는 처량한 모습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이미 이 지상에서 예수님의 신부가 되었으며, 그 혜택을 여러 면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미래의 엄청난 행복과 영광을 보장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이런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세속적인 삶에 도취하여, 세상과 함께 진흙탕에서 뒹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기억 상실증에 걸린 신데렐라와 같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교회는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적인 풍요와 육신적인 쾌락과 평안을 최고의 축복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이라는 조건은 달았지만, 정작 예수님이 하셨던 일과 걸어가셨던 고난의 길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8-9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둠을 좋아하고 따랐던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빛의 새 사람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빛의 사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겸손과 순종과 섬김과 봉사의 삶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행한 삶을 나타내려고 밝은 곳으로 나오게 됩니다. 세상의 어둠의 일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이지만, 빛의 사람의 일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합니다. 그래서 빛의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모습을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8:12절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빛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종종 그리스도인을 등불에 비유합니다. 등은 그리스도인이며 빛을 밝히는 불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등에 불이 켜지면 당연히 주변을 밝히겠지요. 그래서 등불은 모든 것을 비추도록 높은 곳에 둡니다. 마태복음 5:15-16절입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에게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빛의 사람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며, 우리에게는 빛이 더 밝도록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는 곳마다, 머무는 자리마다 빛이신 예수님을 품은 우리의 삶에서 빛의 아름다운 삶을 나타내어 주변을 밝힐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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