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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543회 작성일 2023-12-10 20:43

***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 / 누가복음 19:37-44

 

누가복음 19:37-44, “37 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들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하거늘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하시니라.

 

** 들어가는 말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이 붙은 ‘손양원’ 목사님이 작사, 작곡한 ‘주님 고대가’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 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이 가사를 읽으면, 손양원 목사님의 주님을 기다리던 그 마음이 얼마나 절절한지를 느끼게 됩니다. 저도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이제는 버릇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기다림이 아닙니다. 마냥 하늘 쳐다보며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는 그런 기다림이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말씀들을 지키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사도행전 1:11절에서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쳐다보는 제자들에게 천사가 전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그리고 8절에서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부탁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우리는 주님의 증인으로 신실하게 살면서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제가 감동 깊게 읽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프랑스의 어느 마을에 있는 낡은 교회 마당에 두 손을 활짝 편 예수님 대리석 조각상이 있었습니다.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어느 날, 폭탄이 그 마을 가까이에 떨어져서 그 조각상은 그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적군이 물러가자,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아끼던 그 조각상의 조각들을 찾아서 다시 세우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미켈란젤로나 베르니니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 조각상은 마을 사람들의 삶의 일부였고, 몹시도 아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붙여 만든 상처투성이의 몸체는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조각상의 양손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손이 없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라고 할 수 없다.”라며 한탄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상처투성이 손이라도 괜찮다. 하지만 손이 없어서야 어떻게 주님이라고 하겠는가? 결국 새로 조각상을 세우는 도리밖에 없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한 가지 제안을 했는데, 그 제안이 기꺼이 모두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제안은 이 조각상을 그대로 두고, 조각상의 받침대에 “나에겐 손이 없지만, 당신들에게는 손이 있도다.”라고 쓴 놋쇠 판을 붙이자는 것이었습니다.

수년 후, 어떤 사람이 놋쇠 판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짧은 시가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내겐 손이 없으나 오늘 내 일을 행할 너희의 손이 있도다. 내겐 발이 없으나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할 너희의 발이 있도다. 내겐 입이 없으나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줄 수 있는 너희의 입이 있도다. 내겐 아무런 도움이 없으나 사람들을 하나님 편으로 이끌 수 있도록 돕는 너희의 도움이 있도다.’

 

예수께서 부탁하신 그 마지막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내용의 시입니다. 이는 지금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로서 생각하고 지켜야 할 내용입니다. 대강절을 지나고 있는 지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려 합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생애 중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던 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만세)’를 외치며 환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예수께서 행하신 엄청난 이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37절입니다. “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들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예루살렘에 모인 군중들이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희망으로 들뜨기에 충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약소민족으로 고통받아 왔고, 지금도 로마의 폭정으로 자유를 잃은 고난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죽은 자를 살리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모든 병을 고치시며, 작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시는 능력자가 자신들의 왕이 된다는 희망이 일어났습니다. 이분이 왕이 된다면 로마를 물리치고 부강한 나라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예수님의 행동에서 무엇인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군중들이 ‘만세’를 외치며 들떠있는 사이에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이는 ‘지금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는 이 무리의 영의 눈이 가려져서 예수께서 이루시는 진정한 평화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군중들은 정치적이고 육신적인 자유만을 생각하며,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앞에 기다리는 것은 무서운 전쟁과 패망이었습니다. 이 일을 아시고 예수님은 우셨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였던 그 군중들은 왜 깨닫지 못했겠습니까? 이 일이 오늘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까요? 지금 우리도 혹시 이렇게 깨닫지 못한 채 육신의 일에 빠져 사는 것은 아닐까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던 주님께서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를 보시고 눈물짓지는 않으실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 깨닫는 마음과 행하는 삶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탄식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주로 비유를 통하여 가르치셨는데, 모든 것을 비유로 가르치시는 이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11-16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즉 영원한 생명의 길을 눈앞에 두고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며 저주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깨닫는 것은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며 행복입니다.

 

그러면 먼저, 이스라엘 자손들이 깨닫지 못했던 이유를 봅시다.

본문 42절입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을 ‘너’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부르시는 호칭입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숨겨진 사실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42절에서 말씀하는 ‘평화에 관한 일’이며, 다른 하나는 44절에서 말씀하는 “보살핌을 받는 날” 즉 ‘심판에 관한 일’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깨닫지 못하는 ‘평화에 관한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아이심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죄의 저주에서 풀어주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오셨음’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나 깨나 오매불망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주겠다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그 약속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지만, 메시아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행하시는 방법과 하시는 일이 자신들의 소망과 생각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달랐습니까?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자신들의 육신적인 삶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고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능력으로 로마를 물리치고 자유 국가를 세워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이 사실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통하여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장사 된 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실망과 좌절감을 안고 고향인 엠마오로 돌아가는 두 제자와 함께 걷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슬픔에 찬 그들에게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때 두 제자는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이 난국에서 구원하실 분이라고 생각해 왔소.”(눅 24:21/현대어성경)라고 대답합니다. 즉 자유 국가와 부강한 나라를 이루는 정치적인 메시아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관심이 다른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이 이해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나약한 인간 예수를 거절하고 배척했습니다. 이러한 일은 이미 예고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섬기는 일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안락한 삶을 원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3:34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이스라엘을 보시고 탄식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욕망에 마음이 가려져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먼저 회복되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육신적인 평안만을 원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패망한 이유입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했다’라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관심이 달랐다.’라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관심이 사람을 만든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관심을 따라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관심이 많으면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불교에 관심이 많으면 불자가 되는 것이며, 책에 관심이 많으면 학자가 되고, 산에 관심이 많으면 등산가가 되고, 옛것에 관심이 많으면 고고학자가 되고, 남의 재물에 관심이 많으면 도둑도 되고 사기꾼도 되고 살인자도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돈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면 패망한다(딤전 6:9-10)고 하셨습니다. 이 나라의 교회들도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변질되어 오로지 육신적인 필요와 욕망을 채우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깨닫지 못한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본문 43-44절입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이 섬뜩한 참상의 예고는 경고가 아니라 이미 예정된 심판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의 견고한 예루살렘 성과 아름다운 성전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속으로는 썩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다만 외적인 모양만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영이 어두워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가복음 13:1-2절(공동번역)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 나오실 때에 제자 한 사람이 선생님, 저것 보십시오. 저 돌이며 건물이며 얼마나 웅장하고 볼만합니까?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지금은 저 웅장한 건물들이 보이겠지만, 그러나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영이 어두워지면 보이는 것은 세상적인 것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본문 바로 뒤를 이어서 세속화된 성전의 내면적인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영이 어두워지면 세상적인 것만 보이게 됩니다. 내면의 세계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의식주 생활이 걱정되고, 자식이 걱정되고, 장래가 염려스럽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막4:19)라고 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린도후서 7:10절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영이 어두워 세상을 보고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심판조차 깨닫지 못하고 살게 됩니다. “보살핌을 바는 날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는데, 현대어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기회를 네가 거절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했으며, 공동번역에서는 “하나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자기 생각과 욕망에 빠져서 살다가 구원의 기회를 놓치고 심판을 자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영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을 따라가면 반드시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로마서 12: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힘써야 할 우선적인 일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을 내 생활 속에서 성실하게 행하여 차곡차곡 순종의 열매를 쌓아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기다린다면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다급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생각하는 이 계절에,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실천하는 삶으로 의미 있는 기다림이 되어, 평안과 기쁨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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