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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직분으로 이루는 영광과 만족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671회 작성일 2023-11-26 15:58

*** 의의 직분으로 이루는 영광과 만족 / 고린도후서 3:1-11

 

고린도후서 3:1-11, “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 들어가는 말

 

신.구약 성경은 그 이름처럼 계약, 즉 약속의 책(舊約 old testament, 新約 new testament)입니다. 수많은 약속 중에서 이 시간에 살펴볼 내용은, 의의 직분 즉 성직(聖職)이라고 불리는 교회의 직분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받은 직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직무(職務)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3:13절(현대어성경)에서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은 물론 그 스스로도 주께 대한 확신과 신뢰가 더욱 강해져서 이중의 보상을 받게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주신 직분과 직무를 잘 수행하도록 각자의 재능에 따라 은사(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달란트를 사용하여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생명과 시간을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의무와 책임이 따릅니다. 마태복음 25:14-30절의 달란트 비유에서처럼,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결산할 것이며, 손익을 따져서 상과 벌이 주어질 것입니다. 요한일서 2:28절에서 “자녀들아, 이제 그(예수 그리스도)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직분을 받은 성도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책임감 있게 살아야 합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입니다.

 

본문을 포함하는 고린도후서는 앞서 고린도전서를 에베소에서 써 보낸 후, 두 번째로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입니다. 바울은 첫 번째 편지를 보낸 후, 디도를 보내어 고린도 교회의 상태를 알아보게 하고, 자신은 드로아에서(2:13) 마케도니아로 건너갔습니다. 그곳에서 디도를 만나(7:5), 그 경과 보고를 받았습니다. 디도가 전한 소식 중에서 기뻐할 일은, 첫 번째 편지에 의하여 그들이 회개하고(5:9), 또 바울을 간절히 사모한다는 것(7:7) 등이었습니다. 동시에 슬퍼할 일은 고린도 중에 반(反) 바울주의자가 세력을 얻어, 바울에 대한 온갖 비난을 퍼뜨리며, 그의 사도직과 그의 동기까지 의심하며(1:17), 그의 탐욕을 비난하는 것입니다(12:16), 심지어 바울의 말과 태도까지 문제 삼고(10:1) 있었습니다. 이렇게 희비(喜悲)가 엇갈리는 소식을 접한 바울은 두 번째 편지인 고린도후서를 썼습니다. 그래서 본 서신, 특히 12:19-21절에는 바울의 감정이 드러나면서, 그의 편지 중에서 가장 강한 개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배경을 가진 내용에는,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그들의 죄를 회개하게 하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앞으로 고린도에 갈 때, 서로 기쁨으로 볼 수 있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다른 목적으로는 어려움을 겪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마게도냐 교회가 자신들도 어려우면서 기쁘게 헌금한 것을 상세하게 전하면서 고린도 교회도 동참할 것을 독려합니다. 9:5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는 고린도 교회도 헌금에 동참하게 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의의 직분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본문 6-9절을 봅시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율법에 의한 직분인 “정죄의 직분”은 ‘율법을 행하는 직분’이며, “의의 직분”은 ‘복음 즉 생명의 직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의 교회 직분은 모두가 복음의 직분, 즉 생명을 살리는 직분입니다. 이 직분의 영광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세상 사람들의 만족은 육신적인 것에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만족은 생명의 직분 속에서 주어집니다. 즉 우리가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뜻을 성실하게 수행할 때,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마태복음 6:33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영의 직분 즉 의의 직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새 언약 시대인 복음의 직분들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17-19절에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며,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다.’라고 하십니다. 율법은 없어지는 것이지만, 복음은 이제 나타나는 것이며, 11절 말씀처럼 세상 끝날까지 길이 있을 것입니다. 이 복음의 직분에는 하나님의 약속들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그 가운데 앞에서 보았던 디모데전서 3:13절을 봅시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이 말씀에 등장하는 집사는 사도행전 1장에서 사도들이 안수하여 세운 일곱 집사와 같은 의미입니다. 즉 관리하며, 섬기는 일을 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6:2절에서는 “접대를 일삼는”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목사, 장로, 권사 등. 교회의 직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에베소서 4:12절입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교회의 직분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계급과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영원하고도 영광스러운 의의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의의 직분에는 반드시 따르는 책임감이 있습니다. ‘책임감(責任感, responsibility)’이라는 말은 ‘반응(response)’이라는 말과 ‘능력(ability)’이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의미는 ‘반응할 줄 아는 능력’이 되겠지요. 즉 ‘자신이 맡은 일에 반응할 줄 아는 능력’을 책임감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한 가정의 가장이 되면, 가족을 부양할 책임이 있으며,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정당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감은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요소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무책임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정부와 국회의원들을 비롯하여 사회의 모든 요소요소에서 자신의 권익을 주장하면서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모습들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이러한 일에는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신앙은 철저한 소명(召命)과 사명(使命)의식을 요구합니다. 이는 투철한 신앙적 책임감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실한 동역자인 에바브로디도에 관하여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빌립보서 2:30절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몸이 병들어 죽음의 고통이 있었지만, 교회와 복음을 위한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것이 직분의 책임감입니다.

 

※ 의의 직분은 어떻게 행하는 것입니까?

 

본문 2-3절입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생활을 통하여 나타내는 삶의 모습을 ‘그리스도의 편지’ ‘그리스도의 향기’(엡 2:15)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상 사람들에게 읽히고, 향취나 악취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의 직분을 가진 성도는 말과 행동, 일을 행하거나 약속을 이루는 모든 것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행하여야 합니다.

 

일본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어떻게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기독교 집회가 열렸습니다. 그 집회에 참석한 한 소녀가 발표한 내용이 전도에 대하여 너무 잘 표현하고 있어서 소개합니다.

어느 봄날, 나의 어머니는 작고 보기 흉한 검은 꽃씨를 조금 가져와 심었습니다. 그 꽃씨는 자라나서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어느 날, 그 꽃을 본 이웃 사람이 “이 꽃은 너무도 예쁘군요. 꽃씨를 좀 주시지 않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그 이웃 사람이 꽃씨만을 보았다면 결코 꽃씨를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분은 꽃이 아름답게 핀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 씨를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기독교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에게 성경의 진리에 대해 말해 줍니다. 성경의 진리는 그들에게 매우 어렵고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진리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친절한 말과 착한 행실로 피어난 것을 본다면, 그들은 ‘당신의 삶이 너무도 멋있군요!’라고 감탄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말보다는 우리의 삶 자체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일하는 일터에서, 이웃들과 스치는 모습 속에서, 친구들과의 만남 속에서 말과 행동으로 나를 나타내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내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실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했지만,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마태복음 12:36-37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무서운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보다 더 경각심을 가지게 하는 말씀이 마태복음 18:6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이렇게 내가 별다른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라고 할지라도, 내 말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주님을 떠난다든지, 주님을 욕하게 된다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반면에, 내게 주어진 의의 직분을 열심과 성실함으로 수행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이루게 하시는 영광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디모데후서 4:7-8절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이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고백한 것은, ‘주님께서 맡기신 의의 직분을 끝까지 잘 감당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주시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주시는 의의 면류관만이 아닙니다. 본문 7-11절입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영광과 함께 삶의 만족함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래서 5절에서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만족’이라는 말은 ‘부족함이 없는 충만함’을 생각하게 합니다. 본문의 “만족”이라는 단어는 ὶκανός(이카노스)인데, 이 단어는 ‘도착하다’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단어에는 포함된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시기적인 면에서 때에 맞춰 도착하는 ‘유능함’을 말하며, 둘째, 양적인 면에서는 ‘넉넉함’ 셋째, 성격적인 면에서는 ‘적당함’을 뜻합니다. 이는 ‘모든 면에서 사람들이 흡족해할 만한 요소를 갖추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흡족해할 만한 모든 요소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나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며, 의의 일꾼이 되는 것도 역시 한 개인의 계획이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직분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직분은 영의 직분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스러움과 만족이 있고,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충성되게 여기셔서 주신 의의 직분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생명을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하여 영광과 만족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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