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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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이 남길 잔상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382회 작성일 2022-11-07 16:12

*** 내 인생이 남길 잔상 / 마태복음 25:31-46

 

마태복음 25:31-36, 41-43,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하시니

 

** 들어가는 말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자취를 남깁니다. 내가 살아온 삶이 인생무상(人生無常)일 수도 있고, 후회 없이 아름다웠던 생애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나를 아는 사람들 혹은 후손들은 내가 살아온 인생이 남긴 잔상(殘像)을 기억할 것입니다. 잔상(afterimage)이란, 외부 자극이 사라진 뒤에도 감각 경험이 지속 되어 나타나는 상(image)을 말합니다. 예컨대, 촛불을 한참 바라본 뒤에 눈을 감아도 그 촛불의 상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내가 남긴 생애가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면, 그 잔상효과는 길게 이어지겠지만, 나 자신만을 위한 생애였다면 기억되는 잔상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은 이처럼 저마다의 삶의 자취를 남겼습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 모세, 여호수아, 다윗,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 등. 수많은 사람이 자기 생애의 잔상을 남겼습니다. 특히 모세는 하나님께서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 33:17)라고 하실 정도로 그의 생애는 후손들에게 잊히지 않는 잔상을 남겼습니다. 반면에, 남 유다의 5대 왕이었던 여호람에 관하여는 “여호람이 삼십이 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팔 년을 다스리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그를 다윗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하였더라.”(대하 21:20)라고 했습니다. 여호람은 그 생애의 잔상이 전혀 없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생애는 어떠할까요? 지금까지 어떤 잔상을 남기고 있습니까?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세 가지의 결산에 대한 비유 즉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 비유’ 중의 하나입니다. 열 처녀 비유는 ‘깨어 있어야 한다.’ 달란트 비유는 ‘각 사람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최선을 다하여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인 양과 염소 비유는 ‘지나온 삶에 대한 결산’을 의미합니다. 이 세 비유는 모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과 합당하지 않은 사람 이 두 부류로 나뉩니다. 그중에서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온 사람을 양에 비유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온 사람을 염소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판결하시는 내용’입니다. 양으로 비유된 사람들에게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염소에 비유된 사람들에게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판결하신 기준을 주목해야 합니다. 양이나 염소로 비유된 사람들이 남긴 잔상에 관하여 주님께서 거론하신 삶의 형태는 모두 사회적인 약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판결에 대한 반응은 전혀 다릅니다. 양에 비유된 사람들은 ‘나는 주님께 그렇게 한 적이 없는데요.’라고 했으며, 염소에 비유된 사람들은 ‘내가 주님께 그렇게 하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이들의 의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40절과 45절입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이 말씀을 종합하면 ‘약한 자, 병든 자, 헐벗은 자, 옥에 갇힌 자 등. 사회적인 약자에게 관심을 두고 돕는 것이 인생 결산 때에 천국과 지옥을 판가름하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적인 신앙이 아닌 실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 자취를 어떻게 남기도록 살아야 합니까?

 

※ 모든 사람에게는 결산의 때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에서 말씀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는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단 하루라도 세상에서 살았던 사람이라면 남기는 생애의 잔상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사람의 생애를 판단하는 두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애였는가?’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 뜻과 세상의 흐름대로 살았는가?’라는 것입니다.

 

어떤 중년의 남자가 한적한 해변 길을 혼자 거닐고 있을 때, 파도가 쓸고 간 모래사장에 뭔가 삐쭉이 솟아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아라비안나이트에서 나오는 마법의 주전자였습니다. 남자가 뚜껑을 열자마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그 속에 갇혀있던 종이 연기와 함께 나타났습니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소원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데 이제는 제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 한 가지밖에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잘 생각하셔서 말씀해 주십시오.” 잠시 생각하던 사나이는 종에게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꼭 1년 뒤의 석간신문을 나에게 갖다 주게!” 이 남자는 ‘1년 뒤의 주식 시세를 미리 알아서 그곳에 몽땅 투자하여 큰 갑부가 되리라.’라는 계산을 했던 것입니다. 한참 기분 좋게 신문을 보고 있던 그는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그것은 주식의 시세를 알리는 제일 마지막 부분에 자신의 이름 세 글자와 함께 그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장이 게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것이 꿈이기는 했지만, 자신이 지금까지 육신의 일에만 집착하여 마지막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했다는 자책감이 그에게 몰려왔습니다.

 

영국의 방랑 시인인 데이비스는 인생의 허무함을 이런 시구로 표현했습니다. “인생은 어부, 시간은 강물, 하지만 인간들이 그곳에서 낚는 것은 오직 한 줌의 연기뿐…” 이 내용은 ‘인생이라는 어부는 끊임없이 강물이라는 시간 속에서 행복의 고기를 낚아보려고 했지만 낚는 것은 죽음뿐이었다.’라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노래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결단코 인생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온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결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 죽음에 관하여는 터부시하여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내가 죽음을 외면한다고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11에서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라고 묻습니다. 여기에 합당한 대답이 본문 34-40에 등장합니다. 즉 결산의 때, 주인이신 하나님께 인정받도록 사는 것입니다.

 

예전에, 추석맞이 농산물센터를 방영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엄청나게 큰 건물에는 각 농장에서 출하한 사과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쌓여있었고, 끊임없이 사과를 실은 트럭들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한편에서는 사과 분류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들어오는 사과들이 하나씩 옆으로 굴러떨어졌습니다. 바로 무게를 따라서 분류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곁에는 사람들이 서서 흠이 있는 사과들을 골라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분류된 사과는 각 상자에 담겨서 경매장으로 넘겨졌습니다. 자신의 사과가 경매될 때에 마음을 졸이며, 낙찰가격이 표시되는 전광판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만족스러운 얼굴, 어떤 사람은 실망스러운 표정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두 가지를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는 존재의 목적이며, 다른 하나는 목적을 위한 삶입니다. 아무리 미물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존재하는 목적을 주셨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나름대로 삶의 방식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목적이 있다는 것은 언젠가는 그 목적의 성취에 대한 평가의 때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 목적이 본문 34-36, 41-43에 있으며, 그 결과가 40, 45-46에 있습니다. 이러한 결과에 대하여 예수께서 천국을 비유하시면서 마태복음 13:30에서 말씀하십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그리고 47-50에서는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그리고 마태복음 7:19-20절에서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수확과 선별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의 삶을 결산하는 심판의 때를 표현하는 말씀들입니다. 이처럼, 열매에 대한 수확의 때가 있듯이, 모든 인생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을 어떻게 성취했는지에 대한 평가인 심판의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내 인생에는 어떤 잔상을 남겨야 하겠습니까?

 

인터넷 ‘힘이 되는 좋은 글’에 올라온 글 중에 ‘사람이 죽을 때 후회하는 세 가지’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다가오면, 지내온 일생을 생각하면서 보편적으로 세 가지를 회고한다고 합니다.

첫째. 베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가난하게 산 사람이든 부유하게 산 사람이든 죽을 때가 되면 좀 더 주면서 살 수 있었는데, 이렇게 긁어모으고, 움켜쥐어 봐도 별 것 아니었는데, 왜 좀 더 나누어 주지 못했고 베풀며 살지 못했을까?’라는 후회입니다.

둘째.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쓸데없이 행동했던가?’라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내가 옳았습니다.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좀 더 참을 수 있었고, 조금만 더 여유를 가졌더라면 삶이 달라졌을 것을 후회합니다.

셋째. 좀 더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왜 그렇게 빡빡하고 재미없게 살았던가? 왜 그렇게 짜증스럽고 힘겹고 어리석게 살았던가? 얼마든지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었는데’라는 후회입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세웠던 좌우명이 몇 있는데, 그중에는 ‘오늘 하루, 후회는 없는가?’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루를 마칠 때면, 이 말을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합니다. 이런 좌우명을 세운 계기가 있습니다. 청년 시절 어느 목사님의 설교 중에 ‘사람은 자신의 때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아침에 학교나 일터로 가면서 ‘저녁이면 다시 돌아온다.’라는 의심 없는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내일 아침에는 다시 일터로 나간다.’라는 역시 의심 없는 마음으로 잠을 잔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언젠가는 집에 돌아오지 못하거나, 아침에 일터로 나가지 못하는 날이 반드시 온다.” 이 이야기를 들은 그때부터 지금도 여전히 집을 나설 때면, ‘혹시 내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면’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특히 먼 길을 떠날 때면 ‘혹 지금, 이 모습이 내 마지막 자취가 된다면’이라는 생각으로 몇 번이고 돌아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내 마지막 자취라면, 이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게 되고, 두고두고 회자(膾炙) 될 잔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깨끗하게 정리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앙금을 남기지 않고 그때그때 풀려고 힘씁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4:26-27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매일의 인생이 효과적인 삶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효과적인 삶이란, ‘자신의 삶을 낭비하지 않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이루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이 삶의 형태가 곧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잘 나타납니다. 삶을 낭비한다는 것은, 의미 없이 허비하는 시간을 말합니다. 이 사실을 로마서 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5:21-22에서는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라고 하십니다. 에베소서 5:15-17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소중한 삶을 낭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오병이어의 이적과 칠병이어의 이적에서 백성들이 먹고 남은 음식물 찌꺼기조차 버리지 않도록 모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생명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특히 종말의 때에는 자신의 삶이 낭비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온 생애가 하나님께 그리고 사람들에게 “잘했다.” “열심히 살았구나.” “좋은 사람이었다.”라고 회자 되는 잔상을 남겨야 합니다.

 

야고보서 4:14에서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매일의 삶을 후회를 남기지 않는 아름다운 생애의 잔상을 남기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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