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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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치유와 회복을 위하여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3,286회 작성일 2022-10-24 23:39

*** 내 삶의 치유와 회복을 위하여 / 마태복음 18:21-35, 누가복음 17:3-4

 

마태복음 18:21-35,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누가복음 17:3-4,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라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영성(靈性)이 중요합니다. 이 그리스도인의 영성 가운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영성이 중요하지만, 특별히 마음에 두고 매일 돌아보고 실천해야 하는 것은, 용서와 화해입니다. 히브리서 12:14에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화평’이라는 영성은 예수께서 팔 복을 말씀하시면서 특별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을 통하여 고린도후서 5장에서 “화목하게 하는 직책”과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매일의 삶에서 철저하게 마음정산을 해야 하는 것이 ‘용서와 화해’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기초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사람 사이의 용서와 화해가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하고서는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했습니다. ‘찰스.H 크래프트’ 목사님은 그의 저서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쓰레기가 있는 곳에는 쥐가 꼬여 들듯이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상처들, 즉 미움, 원망, 원한, 증오, 분노, 용서하지 못함 등의 쓰레기가 있으면 그 쓰레기 속에 귀신들이 자리 잡고 여러 가지 문제와 고통을 준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계실 때에 죄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이 내용은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제안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 사회에서는 세 번을 용서하면 위대한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일곱 번을 용서하면 되겠습니까?’라는 말은 정말 대단한 발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발상을 뛰어넘어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당연히 ‘제한 없는 용서’를 뜻합니다. 그러면서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이 비유 중에서 왕의 종이 빚진 일만 달란트는 오늘의 통화가치로는 약 1조 원 정도입니다. 왕은 결산하면서, 1조 원을 빚진 종을 불쌍하게 여겨 탕감해 주었습니다.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종은 발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돌아가던 중 자신에게 100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났습니다. 아마 그 기분이면 100데나리온쯤은 없는 것과 같으니 당연히 탕감해 주겠지요. 100데나리온의 오늘의 가치는 약 천만 원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종은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동료의 멱살을 잡고는 감옥에 넣어버렸습니다. 1조 원과 천만 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 광경을 본 다른 동료들이 민망한 마음으로 왕에게 사실을 아뢰었습니다.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고 책망하면서 감옥에 넣어버렸습니다. 이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가 의미하는 핵심은 35절에 있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누가복음 본문은 회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면서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일에 관하여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그를 실족하게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실족하게 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말이나 행동 등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너 때문에 예수 못 믿겠다.’라는 표현입니다. 이런 실족하게 하는 일 가운데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내게 잘못하고, 돌아와서 ‘내가 잘못했다.’라고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 회개와 용서가 왜 나를 치유하고 회복하게 합니까?

 

현대인들은 너무나 빠르게 지나는 시간과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해야 할 것들이 많아서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혼란스럽고 위태로운 시대를 살아갑니다. 이런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신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치유와 회복에 대한 프로그램들이 많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음악치료, 미술치료, 상담 치료, 대체의학, 천연 치유, 대안학교, 영성 회복, 전인 치유 등. 정신과 몸 그리고 영의 치유와 회복을 위한 노력이 수없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치유와 회복이 중요하지만,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1:2절에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원하노라.”라는 말씀처럼, 몸과 정신의 치유보다 먼저 영의 생명이 치유되고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생명이 치유되고 회복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에서도 많은 경우에 정신적인 질병의 원인이 과거의 인간관계에 있다고 합니다. 즉 ‘어떤 일 때문에 불안하거나 원망과 분노, 원한이 쌓인 것이 정신을 분열시킨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치유하려면 과거의 고통스러운 일을 밝혀내서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심리 치료하는 치료사들이 과거에 있었던 마음의 부담들을 상담이나 최면을 통하여 밝혀내고, 용서하거나 풀도록 하여 치료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에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회개해야 할 것과 용서 해야 할 것,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이, 치유와 회복의 길입니다. 이 순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5:23-24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해하도록 풀어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 혹시라도 다른 사람의 원망 들을 일이나, 회개하지 못한 일이 있다면, 이것부터 해결해야 우리 예배를 받으신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과 막혀 있어 소통되지 않는 것과 하나님과 막혀 있어 소통되지 않는 것은, 둘 다 풀어야 하는 중요한 사항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죄로 죽은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요한일서 4:10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과 화목하고 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이, 우리의 영과 육신의 삶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중요한 영성입니다. 이 화목을 이루는 요소가 회개와 용서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이 회개와 용서에 있어서 망설이거나 중요성을 잊고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마음에 늘 죄책감이라는 무거운 짐을 가둬두고 암울한 삶을 이어갑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이 죄책감입니다. 죄책감은 회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생각난다면, 죄책감에 쌓여 있지 말고 즉시 회개하는 것이 자신이 살고 기쁨과 평안을 유지하는 길입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죄를 백성 탓으로 돌리거나 외면하기에 바빴으며,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는 그 죄책감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했던 베드로는 죽음이 아니라 회개함으로 용서받았습니다. 한편, 다윗 왕은 충성된 신하를 고의로 죽이고 그 아내를 뺏었던 죄가 드러났을 때, 죄책감이 아니라 즉시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주어졌지만, 오히려 그를 용서했습니다. 베드로와 다윗 왕의 결과는 하나님께 용서받고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중요한 회개와 용서에 관하여 예수께서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그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35절에 있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말씀에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라는 부분입니다. 이는 말로만 용서가 아니라,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원한이나, 원망, 미움을 지워야 함을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우리를 이렇게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생각해야 할 중요한 포인터가 있습니다. 혹 내가 회개해야 할 것이나, 용서해야 할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느끼지 못한다고 하나님께서도 모르시는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광장에서 복음을 전하는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죄책감이라는 짐입니다. 참된 행복은 이 죄의 짐을 벗는 데 있습니다.” 이때 한 젊은이가 “그 죄책이라는 짐이 몇㎏이나 됩니까? 나야말로 아무 짐도 느끼지 못하니까 나는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청년이여, 만약 죽은 사람 위에 500㎏의 짐을 올려놓으면 그 시체가 그것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그야 못 느끼겠지요.”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맞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은 아무 죄책도 느끼지 못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자신의 죄책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살아나기 시작한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 영의 치유와 회복은 내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우리 옛말에 “여자가 한(恨)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라고 했습니다. 서양에서는 “Hell hath no fury like a woman scorned.” 직역하면 ‘모멸감을 느낀 여자보다 더 맹렬한 불길은 지옥에도 없다.’라는 뜻입니다. 여자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이런 한이 마음에 품어져 있으면 정신건강뿐만 아니라 영적인 생명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한(恨,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풀리지 못하고 응어리져 맺힌 마음)’은 ‘용서되지 못한 아픈 감정’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억압이나 고통, 모멸감, 억울함 등의 감정이 풀리지 못하고 마음 깊은 곳에 쌓여 있으면, 영과 육신의 삶은 피폐할 것입니다. 이것을 풀어내지 못하면 정신적으로도 피해의식, 망상, 심하면 마귀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잠언 17:22에서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라고 하신 대로, 육신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하게 됩니다.

 

미국에서 전해지는 실화라고 합니다.

살인범이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살인범의 형이 되는 사람은 공직에 있는 동안에 아주 많은 공로를 세워서 잘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형은 주지사를 찾아가서 자기 동생을 사면해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주지사는 그 형의 공로를 참작하여 동생의 죄를 사면해주는 사면장을 형에게 주었습니다. 주지사의 사면장을 주머니에 넣고 형은 곧바로 동생을 면회하러 갔습니다. 형이 동생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네가 사면을 받고 살아서 나간다면 너는 무엇을 하겠니?” 동생은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에 내가 살아서 감옥을 나간다면 첫째로 나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판사를 찾아 그놈을 죽이는 일이고, 그다음에는 내 재판에서 증인으로 섰던 놈을 찾아서 그놈을 죽이는 일이야.” 형은 아무 말 없이 면회를 끝내고 나왔습니다. 교도소 문을 나서는 형의 양복 주머니에는 주지사로부터 받은 사면장이 그대로 들어 있었습니다. 그 동생은 얼마 후에 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원한을 품은 결과는 ‘자신도 용서받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것과 죄를 해결하기 전에는 원만한 관계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러한데 하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먼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용서하지 못한 종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비유까지 사용하시면서 강력하게 말씀하신 뜻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치유되고 회복되어 풍성한 삶을 이루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0:10에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께서는 우리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얻게 하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용서를 구해야 할 것과 내가 용서해야 할 것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시는 치유와 회복으로 영과 육신의 풍요로운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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