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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잘 되는 길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139회 작성일 2022-08-14 14:59

*** 내가 살고 잘 되는 길 / 누가복음 15:11-24

 

누가복음 15:11-24,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 들어가는 말

 

미국 노예 해방운동이 있던 때입니다. 북부는 노예제도가 없어졌지만, 남부에는 아직 노예제도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남부에 살던 흑인 노예가 주인으로부터 도망하여 시카고로 갔습니다. 그 흑인 노예는 자신의 인권을 찾아보려고 변호사를 찾아갔습니다. 변호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먹고살기가 어려워서 도망했나?” “아닙니다. 먹을 것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는 곳이 누추해서인가?” “아니요. 살고 있는 집은 썩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럼 주인의 학대가 심했던 모양이군.” “천만에요. 주인의 학대는 없었습니다.” “그럼 일이 몹시 고되었군.” “일은 충분히 견딜 만 했습니다.” “그럼 자넨 왜 그 좋은 환경을 버리고 도망을 쳤는가?” 변호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노예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러자 흑인 노예는 변호사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환경이 그렇게 좋아 보이시거든 선생님이 제 대신 노예로 들어가시죠.”

 

흑인 노예가 갈망했던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답게 사는 것은 개인에게나, 집단에게나 인간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이자 축복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사람답게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늘 무언가에 쫓기듯이 살고, 무엇엔가 사로잡혀 인간다운 삶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힘들고 답답합니다. 이걸 두고 ‘삶의 노예’라고 부릅니다. 이런 삶의 노예 상태는 사람이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하나님의 사람 중에도 많아서 세상에 매여 답답하게 살아갑니다. 갈라디아서 5:1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라고 하셨지만,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삽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 아니면 늘 무엇엔가 쫓기는 듯이, 세상의 것에 붙잡혀서 삽니까? 그래서 이 시간에는 나 자신이 사람답게 살고, 진정으로 잘 되는 길을 살펴보겠습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잃었다가 찾은 비유가 나옵니다. ‘잃은 양 비유’ ‘잃은 드라크마 비유’ ‘잃은 아들 비유’입니다. 이 세 비유는 모두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관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관심은 모두 하나님을 떠난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앞의 두 비유인 양과 드라크마의 비유도 결국은 하나님을 떠난 죄인을 의미합니다. 본문 앞쪽의 7절과 10절에서 같은 의미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애정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죄인들을 향하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본문에서는 더 확실하게 아버지의 집을 떠나 세상에서 허랑방탕한 아들을 등장시켰습니다. 아버지의 둘째 아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재산을 모두 챙겨서 아버지를 떠나 세상으로 갔습니다. 아버지의 보호막에 갇혀 사는 것이 답답하게 여긴 아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꿈꾸며 세상으로 갔습니다. 우리 사는 세상이 그러하듯이 돈이 있을 때는 세상 사람들이 친절하고 가까이하려고 합니다. 이 아들도 한동안은 돈으로 세상에서 황제 노릇을 했겠지요. 하지만 돈이 떨어지자 주변에는 그 많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 버리고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질긴 목숨을 부지하려고 돼지치기로 취업을 했지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절대빈곤입니다. 결국, 죽음의 문턱에서 아버지의 집을 떠올리게 되고 ‘염치없지만, 품꾼으로라도 써달라.’라고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아버지께로 갑니다. 아버지 집이 가까웠을 때 아들의 눈에 대문에서 서성거리는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이후부터 지금까지 ‘혹시나 아들이 돌아올까!’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재산을 다 팔아먹은 아들이었지만 얼싸안고 반갑게 맞이하며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아버지의 명대사입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이것이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며 사랑입니다.

 

집을 떠났던 둘째 아들은 자유롭고 사람다운 삶을 살아보겠다고 아버지의 간섭을 떠났지만, 결과는 사람다운 삶이 아니라 죽음이 눈앞에 이르는 상황까지 왔습니다. 이 내용에서 예수께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과 잘 되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내가 사람답게 살고 잘 되는 길은 하나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2021년 기준으로, 212개 국가, 5500여 민족, 77억여 명이 살고 있습니다. 이 많은 사람은 모두 지문이 다르듯이 삶의 방식과 개성도 다릅니다. 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서 기본적으로 원하는 것은 나라와 민족을 막론하고‘잘 살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리라 여겨집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는 환경과 상황, 개인의 성향에 의하여 제각각 자신의 길을 가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삶에서 잘 되고,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지식과 지혜를 구하고,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가지려 하며, 종교에 의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옛말에 “독불장군은 없다.”라고 하듯이, 사람은 혼자 살기에는 너무나 약하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서로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공동체적 속성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그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그리고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로 이끌어오셨습니다. 이렇게 인류의 시작부터 인간은 공동체적인 성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애초에 하나님께서 서로 돕고, 격려하며, 위로하며, 협력하며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사람답게 산다는 것을 이해하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의식주와 생존과 번식 등. 이런 육체적인 삶은 인간이나 짐승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짐승이나 다른 피조물에는 없는 특별한 생명을 사람에게 더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2:7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生氣)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되니라.”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에는 없는 “생기” 즉 ‘영’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사람이 잘 사고 사람답게 사는 길을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할 때, 진정한 생명과 삶의 의미가 있게 됩니다. 그 이유가 창세기 6:3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이 말씀에서 “육신”은 rc;B;, ,영어로 flesh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영(靈)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육체’ ‘몸’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육체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잘 사는 길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할 때, 비로소 완전한 존재가 되어 자신의 목적에 맞는 삶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에 보내는 편지를 통하여 로마인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확인시킵니다. 로마서 1:18-20을 봅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할지라도 세상의 모든 만물을 보면 신의 능력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과정을 본문의 탕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십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방탕하고 고집스러운 둘째 아들은 자기 생각과 지식과 감정을 따라서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자신을 자유스럽고 행복하게 해 줄 파랑새가 세상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탄의 미혹에 빠져서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과 흡사합니다. 탕자는 아주 잠깐, 재물이 있는 동안은 그런 듯이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핑크빛 행복은 재물과 함께 사라져버렸고, 남은 것은 굶주림과 고독 그리고 생명의 위기뿐이었습니다. 탕자는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탕자는 모든 것이 풍족한 아버지의 집이 그리웠습니다.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선뜻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진 고통과 생명의 위기가 탕자를 아버지 집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세상의 이치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세상에서 어려움과 고통, 생명의 위기를 만났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존재를 찾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 부족과 한계를 통하여 신적인 존재를 찾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탕자는 자기가 원하는 삶을 마음껏 누리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떠난 세상에는 탐욕과 자기 이익을 위하여 우리를 이용하려는 사람들, 무시와 궁핍과 고통과 죽음이 가득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세상에서 겪게 되는 환경과 상황들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5:5-6에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을 떠나서는 사람다운 삶도, 잘 사는 길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어떤 것입니까?

요한복음 15:10절과 12절을 봅시다.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인데, 그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범위가 너무도 넓지만, 작은 예를 보겠습니다. 혹 여러분들도 이런 경우를 만난 적이 있을 것입니다.

 

9살짜리 아들과 엄마가 집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을 보면서 긴 차량 행렬에 끼어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잽싸게 자동차 앞 유리에 스프레이로 세정액을 뿌리고는 걸레로 닦기 시작했습니다. 운전자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유리를 닦고는 손을 벌리며 돈을 요구했습니다. 그 엄마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는 움직이는 차량 행렬을 따라 출발했습니다. 그때 아들이 말했습니다. “엄마, 왜 '아니'라고 유리 닦는 사람에게 소리를 치셨어요? 창을 닦게 하고 돈을 좀 주시지 않구요!” “이 사람들은 어거지로 돈을 받아내려고 하는 거야. 그 돈으로 그들은 술을 마시거나 마약을 맞을 거야. 내가 돈을 주면 단지 그들의 나쁜 습관을 지속시키는 결과가 되겠지.”라고 엄마는 어린 아들에게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어른스럽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잖아요. 불쌍한 생각이 들어요. 누가 엄마에게 소리를 지른다면 엄마의 기분이 어떻겠어요. 배고프고 돈이 없다면 엄마의 기분은 어떻겠어요?”

엄마는 마음이 찔렸습니다. 이 일 때문에 저녁에 가족회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남편도 역시 평소 유리 닦는 사람들에게 큰소리를 지르는 사람인데, 아들의 주장을 귀담아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유리 닦는 사람들을 기꺼이 맞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또 하나를 제안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을 나누어주면 어때요?” 그래서 이제 우리는 포켓용 성경과 집에서 만든 머핀과 1000원을 준비해서 다닙니다.

 

이런 예는 우리가 흔히 놓치기 쉬운 작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25:40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하셨고, 45절에서는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탕자는 자신의 상황을 깨달은 후, 즉시 아버지께로 돌아갔으며, 아버지는 죄를 묻지도 않으시고 기꺼이 맞아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달은 후 즉시 하나님 뜻으로 돌이킬 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어야 포도나무답고 잘 되는 것처럼, 내가 사람답게 살고 잘 되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을,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즉시 실천하여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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