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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914회 작성일 2022-06-27 00:19

*** 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 / 예레미야 29:10-14, 고린도전서 3:5-9

 

예레미야 29:10-14, “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14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고린도전서 3:5-9,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 들어가는 말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에 눈이 가고, 원하는 것에 마음이 가게 됩니다. 주변에 많은 것이 있어도 자기가 원하는 것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밥상에 많은 반찬이 있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반찬에 젓가락이 가게 되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수많은 말씀을 읽기도 하고 듣기도 하지만 자기 마음이 끌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지 않는 말씀은 들어도 감동이 되지 않게 되고, 당연히 생활에서 실천되지도 않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영적 편식(偏食)’이라고 합니다. 음식을 편식하는 것이 건강에 좋지 않듯이, 영적인 편식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저주를 선언하시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면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내 인생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고, 내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순종하는 것이 삶을 기름지게 하고 영원한 약속을 받게 합니다.

 

영국의 소설가이며, 영국 성공회 교인인 'C.S.루이스(Clive Staples Lewis)'의 글에 이런 풍자적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푸쉬’라는 이름의 고양이 한 마리가 런던을 방문했습니다. 루이스는 런던을 방문하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는 고양이에게 물었습니다. “푸쉬야, 푸쉬야, 너 어디 갔다 오니?” 그러자 고양이는 “예, 나는 여왕을 만나러 런던에 갔다 오는 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루이스가 다시 물었습니다. “푸쉬야, 거기서 너는 무엇을 보았니?” 그러자 고양이는 “나는 여왕의 의자 밑에 있는 생쥐를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짧은 이야기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루이스는 이 이야기를 통하여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꼬집는 것입니다. 고양이는 런던에서, 그것도 그 아름다운 왕궁에 가서 엘리자베스 여왕이나 찬란한 궁궐이나 아름다운 역사적인 사적들을 본 것이 아니라, 겨우 여왕의 의자 밑에 기어 다니는 생쥐를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양이에게는 가장 큰 관심거리가 생쥐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자신의 가장 큰 관심거리에 마음을 두게 되며 그것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불평하고 원망하고 짜증을 내게 됩니다. 우리는 능력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지만, 믿는 것 만으로는 삶이 별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루이스 이야기의 고양이처럼 궁궐에 있을지라도 고양이의 관심은 오직 먹이에 있듯이 하나님을 믿지만, 생활은 여전히 세상의 관심으로 채워져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여전히 멀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본문 12-13절에서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안에 머물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구약 본문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남 유다 백성들에게 선포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선포된 때는 이미 남 유다는 하나님을 배반한 벌을 받아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갔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난 북쪽 이스라엘을 징계하심으로 이미 경고하셨습니다. 북이스라엘이 비참하게 멸망 당하는 모습을 보았던 남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의 말을 비웃고 무시했습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이 멸망 당한 135년 후, 남 유다도 같은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한 남 유다의 징벌 기간을 70년으로 예고하셨습니다. 70년이라는 긴 기간을 남 유다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를 지고 고통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70년이 마치면 하나님께서 ‘포로 된 모든 곳에서 돌이켜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유다 백성을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11-13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궁극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권자임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유대 백성이 따르던 세상의 권력과 물질과 우상들은 아무런 힘이 없는 것이므로 따라가지 말고, 온 세상의 일을 정하시고 이루시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신약 본문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고린도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인간적인 욕망에 사로잡혀서 서로 시기하고 분쟁을 일으켜서 당을 짓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한 바울과 목회자인 아볼로와 그리스도파로 갈라져서 다툼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역자들과 성도들의 역할을 소상하게 설명하여 가르칩니다. 본문 6-8절입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도도 역시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일을 다스리시고 결과를 내시는 주권자이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사람을 따르지 말고 오직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만을 믿고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관심거리가 되는 주제는 ‘인권(人權)’입니다. 인권이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권리’를 말합니다. 물론 한 사람의 인권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는 어린아이 한 생명도 사랑하시며 인격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이 주장하는 인권은 성 소수자를 비롯하여 하나님의 법에 도전하는 진정한 인권이 아닌 차별이며 만용(蠻勇)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지만, 보편적인 평등이 아닌, 인간의 이기적인 욕구를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인권위원회와 입법부가 추구하는 차별금지법은 오히려 소수를 위해 다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차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권리를 앞세우며, 세상에 빠져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 대가(代價)는 고통스러운 노예의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스럽게 노예생활을 하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이는 당면한 환경 때문에 불평하고 원망하지 말고 주인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진정한 회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자기 생활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첫째는 순종입니다.

요한복음 13:13-17절을 봅시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이 말씀의 핵심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은 ‘나의 모든 영과 육신의 삶이 주님의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저절로 ‘예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첫 번째 표징은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종을 요구하심은 예레미야 본문 11-13절처럼, 우리에게 희망과 회복, 응답과 행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앗시시의 성자 프랜시스(St. Francis of Assis)’의 유명한 일화 중의 하나입니다.

어느 날, 프랜시스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두 젊은이가 프랜시스를 찾아왔습니다. “선생님의 제자가 되어 신앙의 훈련을 받고 싶습니다.”라고 하자 프랜시스는 대답은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밭에 나가면 배추들이 많이 있는데, 그 배추를 뽑아서 뿌리를 하늘로 가도록 하여 다시 심고 오시오.” 한 젊은이는 말없이 밭으로 가서 배추를 뽑아서 거꾸로 심기를 시작했습니다. 다른 젊은이는 “참 이상도 하지. 이 성자가 오랫동안 도를 닦더니 머리가 이상해졌나 보다.”라며 떠나버렸습니다.

 

프랜시스의 의도가 무엇인지 눈치채셨습니까? 프랜시스는 제자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순종’을 꼽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말도 되지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스승의 말에 순종할 줄 아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첫 번째 자질입니다. 앞서 읽었던 요한복음 13:15-17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기며 본을 보인 대로 너희도 그렇게 순종하여 행해야 한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라고 하십니다. 제자이든지 종이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따르고자 한다면, 주님께서 어떤 것을 요구하시든지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왜 주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십니까? 이유는 순종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과 은혜를 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 의사가 진단하고 처방한 치료 방법을 잘 지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래야 치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를 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모든 복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두 번째는 ‘만족과 감사’입니다.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만족 결핍증입니다. 자기의 형편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면서 “무엇인가 부족하다.”라고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세상의 것을 추구합니다. ‘나는 그렇지 않은데!’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생활 속에서 불평하고, 걱정하고, 짜증을 내는 이유는 다름 아닌, 불만족입니다. 어린아이가 보채고 우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요구사항이 충족되지 못하다는 표현이듯이, 우리도 자기 생각이나 계획, 자기 뜻이 무시되거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내 주인이시고 내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심을 믿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만족과 감사입니다.

 

옛 노예제도가 있던 미국의 어느 마을에 ‘로크맨’이라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는 대단히 현명하였고, 모든 일에 열정이 있어서 주인에게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의 동료들은 미련하리만큼 충성스러운 로크맨에게 “주인이 보지 않을 때는 쉬엄쉬엄 몸을 생각해가며 일하라.”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씩 웃을 뿐!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똑같이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 로크맨을 주인은 대단히 신임하였고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하도록 허락했습니다. 다른 종들을 이러한 로크맨을 시기하여 주인에게 “로크맨이 주인님 앞에서는 충성을 다하면서 뒤에서는 주인님을 욕하고 있습니다.”라며 모함을 일삼았습니다. 하루는 주인이 정말 그런가 하여 로크맨을 시험해보기로 했습니다. 주인은 로크맨을 불러서 조금 상하고 아주 쓴 참외를 한 개 주면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로크맨은 참외를 받아 쩝쩝거리며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주인은 “아니, 어떻게 그 쓰고 구역질 나는 참외를 그리 맛있게 먹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로크맨은 “주인님께서 제게 좋은 것들을 많이 주셨으니, 주인님께서 주시는 쓴 것도 달게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감격한 주인은 그를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좋은 일에 감사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할 줄 압니다. 만족할 수 없고, 감사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감사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왜 그렇게 모든 일에 만족하며 감사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과 주어지는 모든 환경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본문 6-8절을 봅시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일이든지 그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불행한 일이나, 원하지 않는 일이나, 어려운 환경을 만날 때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곧 그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에게 이런 어려운 환경이 주어지더라도 로크맨처럼 주인의 뜻에 불평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마땅하게 받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 합당한 상급으로 채워주십니다. 지금의 상황과 환경이 불편하고, 힘들고, 어렵습니까? 먼저 감사해 보세요. 빌립보서 4:6-7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진정한 주인이심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께 이야기하십시오. 주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채우시고 인도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모셔서 매일 매순간이 하나님이 이루시는 기적으로 채워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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