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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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평화를 주시는 예수님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557회 작성일 2021-12-27 16:43

*** 기쁨과 평화를 주시는 예수님 / 누가복음 2:8-20

 

누가복음 2:8-20,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하고,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20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 들어가는 말

 

세상에는 슬픈 일도 많고 기쁜 일도 많습니다. 누구에게나 일평생 슬픔만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기쁨만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일이 잘되고 형통할 때가 있는가 하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기 마련입니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도 있지만, 알아주지 않거나 무관심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이처럼 일이 잘되는 것이나, 잘 안 되는 것이 번갈아서 주어지는 이유를 전도서 7:1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즉, 사람들이 교만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고 실망을 줄 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우리의 생활을 이끌어가시며,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기쁨과 평안을 알게 하시고 누리게 하십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것을 기뻐하며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께서 사람으로 세상에 오심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소망과 행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 14: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라고 하셨고, 16:33절에서는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16:22절에서는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니라.”라고 하시며, 24절에서는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이는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는 자녀들에게 하신 변하지 않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성도에게는 주님께서 함께하시며, 삶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하십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탄생과정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탄생과정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자세하게 기록했는데, 마태복음의 내용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본 것이며, 누가복음은 이방인에게 나타내는 내용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기록했습니다. 1:25-56절까지는 잉태된 과정과 예수님의 출생 목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본문 앞쪽의 1절부터 본문을 포함하는 20절까지는 예수님의 출생과정과 환경을 집중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소상하게 기록한 것은,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이 하나님의 섭리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장차 예수께서 나타내실 일의 표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본문 앞쪽의 7절입니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이 짧은 구절에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시는 의미가 깊습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3:22-23절(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과 6:3절(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ר????????, flesh, 짐승)이 됨이라.), 요한복음 6:22-59절(5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언약 파기로 에덴에서 쫓겨난 인류의 조상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짐승(영적 생명이 없는)이 되었는데, 이 인류에게 생명을 회복(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짐승의 집인 마구간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짐승들의 먹이통인 구유에 누인 예수께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면 생명을 회복하게 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역사적인 현장에 초대된 사람들이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이었습니다.

 

※ 예수께서 기쁨과 평화를 이루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3: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셨고, 이사야 48:22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고 죄에 빠짐으로써 이후 모든 인류에게 죄가 전가되었습니다. 로마서 5:12절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처럼 온 세상에 죄의 어두움으로 덮인 이후,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진정한 기쁨과 평화는 사라졌습니다. 기쁨과 평화가 있던 자리에는 죽음과 미움과 싸움과 두려움, 원망, 근심, 걱정이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혼란과 죽음의 두려움이 깔렸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혼란과 죽음의 두려움을 잊어보려고 세상적인 육신의 즐거움과 자신의 감정에 몰입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송 가사에서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 간다. 이 모든 인간 고통 두려움뿐 그 지겨움 끝없네”라고도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없는 세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은 고통과 두려움이 모든 곳에 서려 있습니다.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세상을 떠난 다음, 어떤 신문기자가 그의 부인과 인터뷰 했습니다. 기자가 “부인, 부군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아십니까?”라고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부인은 “나는 모릅니다. 내가 어떻게 그 원리를 알겠습니까?” 그러자 기자는 “그러면 아인슈타인에 대해 무엇을 아십니까?”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좀 건방진 듯한 기자의 물음에 부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그가 내 남편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그가 열심히 연구했다는 것과 그의 진실한 인품을 압니다. 그런 까닭에 상대성 원리는 모르지만, 남편 아인슈타인을 사랑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아내가 자신의 남편을 사랑한 이유는 ‘자신을 향한 남편의 인품과 사랑을 알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2000년 전에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고, 지금도 함께 하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또한 나를 위하여 영원한 행복을 준비하고 계신다.’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는 두려움에서 해방하시고 기쁨과 평화, 행복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일서 4:18절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이 사실을 모르거나 믿지 못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두렵게 느껴지거나, 전혀 의지하지 못하거나 무관심하게 됩니다. 주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는 사람에게는 진정한 기쁨도 삶의 평화도 없습니다.

 

※ 이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옛 어른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사람이 일할 때는 일머리를 알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일의 순서를 알아서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 해야 할 것을 잘 분별하여 순서대로 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일의 순서가 바뀌면 힘들기도 하겠지만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도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원한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앞서 서론에서 읽었던 요한복음 14:27절을 다시 봅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리고 16:33절도 보겠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24절도 봅시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그리고 본문 14절에서도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찌든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고 의지하지 못합니다. 예수님 보다는 세상이 먼저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 준 사람은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한밤중에 들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전해주셨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들은 세상의 것으로 찌들지 않은, 아직은 마음이 순수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하십니다.

 

한 중년의 부인이 병원을 찾아왔습니다. 부인은 ‘머리가 짜는 듯이 아프고, 가슴도 늘 조이는 것처럼 아프다.’라고 호소했습니다. 의사는 폐와 심장을 진찰하고 혈액 검사를 했지만,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틀에 걸쳐 종합검진을 했지만, 여전히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가정적으로 불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성실하고 관계도 좋았으며, 아이들도 착했고 효성스러웠습니다. 그런데도 부인은 무엇엔가 불안했고 마음이 우울했습니다. 결국, 그 부인은 상담 치료사를 찾아갔습니다. 치료사와 상담을 해 가는 동안 자신의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술고래였던 아버지는 걸핏하면 집에 들어와 어머니를 때렸고, 아이들을 폭행했습니다. 동네 사람들 보기도 부끄러웠습니다. 아이는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 결심을 했습니다. “죽어도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겠다!”

세월이 지나 아이는 성장했고 결혼도 했습니다. 그토록 혐오했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부인은 아이를 키우며 그 괴롭던 시절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부인의 마음속에는 아버지를 향하던 증오가 서려 있었고, 그 증오는 독버섯처럼 자라면서 부인의 정신을 황폐하게 했던 것입니다. 상담사의 권유를 받아 부인은 “이제는 아버지를 용서하겠습니다.”라는 고백했습니다. 그 이후로 부인의 마음은 밝아졌고 머리나 가슴도 더는 아프지 않았습니다.

 

옛말에 “여자가 한(恨)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한(恨)’이라고 하는 것, 즉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이토록 무섭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먼저 자신의 삶을 황폐하게 하고, 나아가서 주위의 사람들을 함께 파멸시키는 무서운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막는 담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6:14,15절에서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인간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이 곧 용서로 비롯되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고 의지한다면, 나를 용서하신 주님을 닮아 다른 이들을 용서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내 삶에 기쁨과 평화 그리고 이로 말미암는 행복을 누리게 하는 길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내용인 ‘주님으로 말미암는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현상’을 봅시다.

본문 20절입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목자들은 자신에게 전해준 복음을 믿었고, 확인했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찬송했습니다. 즉 목자들은 자신들에게 전해진 복음을 마음에만 간직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은 믿음으로 실천할 때 주어지며 누리게 하십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우리의 마음은 기쁨과 평안, 행복으로 채워지며 찬송하게 됩니다. 이 기쁨과 찬송이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송할 때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큰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이 힘들고 어려운 세상 환경에서도 마음에 평화가 있고,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송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주님으로 말미암는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이 성탄에 주님을 믿고 의지하여 주님으로 말미암는 기쁨과 평화로 채워진 행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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