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강인한 하나님의 사람
*** 강인한 하나님의 사람 / 로마서 8:31-39
로마서 8:31-39,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들어가는 말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에는 전쟁, 액션물, 사극, 애로, 애니메이션, 공상과학 등. 여러 주제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요즘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영웅들이 등장하는 액션물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람보, 슈퍼맨, 원더우먼, 배트맨, 스파이더맨 등. 한 영화나 드라마에 한 사람의 영웅이 등장하여 시원한 액션으로 사회나 지구를 구하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영웅들 대여섯 명이 떼를 지어 등장하여 엄청난 전투장면들을 연출합니다. 그 이유를 추측해보면, 현대인들이 웬만한 자극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면이 있고, 한편으로는 그만큼 사회가 불안하다는 방증(傍證)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하거나 예측하지 못하는 일이나 미래에 대하여 긴장하거나 두려움이 앞서며 그것을 헤쳐나갈 방법을 찾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의 미래는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미지의 분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긴장과 두려움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슈퍼컴퓨터를 동원하여 허리케인, 태풍, 지진, 화산, 쓰나미, 질병 등. 미래의 상황을 예측하려고 노력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개인이나 가정, 사회활동을 하면서 두려움과 고통을 주는 환경들을 미리 예방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예컨대, 각종 보험을 마련하거나, 노후를 위한 보장, 재난을 위한 각종 대비 물품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계가 당면한 환경을 보십시오.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전염병, 지진, 화산폭발, 태풍, 홍수, 가뭄 등. 사람이 예측하고 준비하는 것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전도서 7:13-14절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우리 인간의 삶에는 좋은 일과 환난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미래를 예측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령 안다고 해도 그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될 대로 돼라.’라는 심정으로 사는가 하면, ‘두려움과 염려’로 마음 졸이며 살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런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먼저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로마에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생겨난 것은 아마도 오순절에 복음을 접한 ‘로마에서 온 사람들’에 의한 것이리라 추측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께서 임하셨던 일이 있었으며, 성도들의 성령 충만으로 말미암아 15개 나라의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 당시에 오순절을 지키려고 각 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모여들었는데, 그들이 이 방언의 표적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언어로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중에는 ‘로마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10에서,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이라고 증언합니다. 이들이 복음을 듣고 돌아가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복음이 막 시작된 로마에는 신앙을 가르치고 지도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기독교의 초기였으며, 이방 세력이 강력한 도시였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기초부터 튼튼하게 세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율법과 복음의 차이에 대한 이해도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는 율법과 복음에 대한 설명이 많으며,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된 과정까지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에 가장 적격인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이어서 율법에 정통했으며, 헬라문화에도 정통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이렇게 바울을 통하여 로마교회를 든든하게 세워야 할 이유는 곧 다가오게 될 혹독한 박해와 핍박을 견딜 수 있도록 믿음의 담력과 용기를 심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상황을 감안하시고 본문 말씀처럼 확신의 차원을 넘어 담대한 믿음의 담력을 주십니다. 본문 31절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강인한 마음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 우리가 강인할 수 있는 조건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 알듯이 우리 마음이 떳떳하지 못하면 결코 담대하지 못합니다. 옛말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행동이 떳떳하지 못하면 전혀 상관없음에도 불구하고 놀라거나 마음이 위축되게 됨’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3:20-21절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경영을 아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게 되고 자꾸만 피하고 멀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삶이 담대하지 못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하지 못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반면에 ‘어떤 자리에서도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음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성실하고 정직하며 최선을 다함’을 나타냅니다. 내 생활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최선을 다할 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가 불일 듯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담대하고 강인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러면, ‘담대하고 강인하다.’라는 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담대함이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확신입니다. 사람들은 환경이나 여건에 상관없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는 강하고 담대하지만, 확신이 없을 때 약해지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담대하고 강인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며, 순종한다.’라는 것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합니다. 그래서 본문 31절에서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자세하게 풀어주신 말씀이 33-34절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리고 이어지는 35-39절까지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보호와 보장의 내용을 자세하게 풀어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이유는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3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말씀이 우리에게 하시는 것임을 요한일서 5:4-5절에서 밝혀주십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즉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이 세상을 이기는 예수님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능력을 받아 세상을 이기는 강인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강하고 담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를 구원하신 주인으로 확신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 강인한 하나님의 사람이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 앞쪽의 24-25절을 봅시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소망인 하나님의 나라를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 때문에,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구원이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구원의 완성은 우리 육신의 생명이 이 땅에서 끝나는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이 구원을 유지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음으로 기다리라.”라고 하시며,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6-8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생명이 다하는 이 순간까지 믿음을 지켰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음을 지켜갈 수 있습니까?
말씀 두 곳을 보겠습니다. 먼저 히브리서 12:1-3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다음으로 고린도전서 9:24-27절입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이 말씀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며, 절제하고 인내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내가 원하는 것이 귀한 것일수록 더 주의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미국 콜로라도에는 ‘롱의 봉우리’라고 하는 유명한 곳이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400년 묵은 고목이 쓰러져있는데, 그 죽은 나무가 대단히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 나무는 자기 일생에 14번이나 벼락을 맞았으며, 수많은 눈사태와 폭풍우를 견뎌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조그마한 딱정벌레들이 이 나무에 기어들어가 나무의 속을 갉아먹기 시작하였고, 차츰 나무는 거대한 체구를 지탱하고 있던 힘을 잃었습니다. 나무는 커다란 재해를 이겨내고 장장 400년이 넘도록 살아왔지만, 정작 딱정벌레들의 습격에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속이 비고 썩은 거대한 나무는 쓰러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온갖 풍상을 다 겪고 이겨낸 나무가 자그마한 딱정벌레 몇 마리 때문에 쓰러지다니, 정말 허무하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우리를 무너뜨리는 이런 딱정벌레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과 염려이며, ‘괜찮겠지!’라는 안일함과 자만심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이며, 자기 교만인데 마치 인생을 쓰러뜨리는 딱정벌레와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지만, 현실이 두렵고, 생활의 염려로 불안해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나약하게 하며, 하나님의 능력이 이르는 통로를 막는 불신입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도 승리의 삶을 이루는 강인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러한 순종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하며,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게 합니다. 불안과 혼란이 가중되는 현실이지만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여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강인하고 담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