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특별한 사람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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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3-14 22:47
*** 하나님께 특별한 사람 / 누가복음 15:11-24
누가복음 15:11-24,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 들어가는 말
사람들은 ‘특별한(special)’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자존감이 높아지는 기분 좋은 일입니다. 얼마 전에 라오스에 사는 우리나라 사람이 ‘라오스인의 생활을 보여주는 유튜버의 활동’을 본 적이 있습니다. 주로 시골 지역을 보여주었는데, 언뜻 보아도 우리나라 60년대의 시골집을 보는 듯한 풍경이었습니다. 그 집에서 밥 한 끼를 얻어먹었는데 밥과 반찬 한 가지가 전부인 밥상이었지만 그것이 인연이 되어 한국의 구독자들의 후원을 받아 그 집을 통째로 바꾸어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집은 밥 한끼 대접했다가 삶의 질이 바뀌는, 한 마디로 대박이 난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시리즈로 몇 편을 보다가 이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찢어지게 가난한 집이 잠깐 들른 사람을 대접했다가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브람이 천사들을 대접했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의 근원이 되는 특별한 인생이 된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따져보면 라오스의 가난한 집이나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지금의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똑 같은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에베소서 2:3-5절입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이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우리가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려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잃었다가 찾은 비유가 나옵니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이 세 비유는 모두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관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관심은 모두 하나님을 떠난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앞의 두 비유인 양과 드라크마의 비유도 결국은 하나님을 떠난 죄인을 의미합니다. 본문 앞쪽의 7절과 10절에서 같은 의미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애정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죄인들을 향하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본문말씀에서는 보다 더 확실하게 아버지의 집을 떠나 세상에서 허랑방탕한 아들을 등장시켰습니다. 아버지의 둘째 아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재산을 모두 챙겨서 아버지를 떠나 세상으로 갔습니다. 아버지의 보호막에 갇혀 사는 것이 답답하게 여긴 아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꿈꾸며 세상으로 갔습니다. 우리 사는 세상이 그러하듯이 돈이 있을 때에는 세상 사람들이 친절하고 가까이 하려고 합니다. 이 아들도 한 동안은 돈으로 세상에서 황제노릇을 했겠지요. 하지만 돈이 떨어지자 주변에는 그 많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 버리고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질긴 목숨을 부지하려고 돼지치기로 취업을 했지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마저도 없었습니다. 절대빈곤입니다. 결국 죽음의 문턱에서 아버지의 집을 떠올리게 되고 염치없지만 품꾼으로라도 써달라고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아버지께로 갑니다. 아버지 집이 가까웠을 때 아들의 눈에 대문에서 서성거리는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이후부터 지금까지 ‘혹시나 아들이 돌아올까!’하는 마음으로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재산을 다 팔아먹은 아들이었지만 얼싸안고 반갑게 맞이하며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아버지의 명대사입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이것이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며 사랑입니다.
※ 우리가 왜 특별한 사람입니까?
전도서 7:29절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마음대로 살아왔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생활에 대하여 ‘하지 말라는 것도 많고, 하라고 하는 것도 많아서 숨이 막히는 것 같다.’고 하며, 하나님을 떠나갑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도 이런 이유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즐길 것도 많고, 신앙적인 제약만 피한다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지천에 늘려 있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더 합니다. 여러분도 느끼시겠지만 영적인 감각만 버린다면 할 수 있고 즐길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지금의 저나 여러분이나 삶의 가치관만 바꾼다면 세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현혹하기에 충분합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8:8절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하나님을 잊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대하여는 관심도 없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입니다. 바로 이 세상의 삶의 자리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2:19절에서 선언하신 바로 그 자리입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람들은 삶의 고통과 환난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인 줄도 모르고, 아니 안다고 해도 인정하지 않고 그렇게 고통을 안고 삽니다. 탕자와 같은 이러한 인생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소망을 잃고 한 순간의 삶을 위하여 정처 없이 사는 이 죽음의 자리에서 진정한 소망의 자리로 옮길 기회를 부여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성도치고 이 말씀 모르는 사람이 없을 터인데, 이 말씀이 곧 모든 사람에게 주신 생명의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깨달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별한 은혜가 주어집니다. 요한복음 1:12-13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이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그렇습니다. 죄인 된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특별대우입니다. 즉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 하나님께 특별한 사람들에게 어떤 은혜가 주어집니까?
예전에 선교원을 할 때, 아이들에게 자주 보여주었던 비디오가 있습니다.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 목사가 쓴 ‘너는 특별하단다(You are special).’라는 어린이 베스트셀러 책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작품입니다. 루케이도 목사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잡지 ‘크리스차니티 투데이(Cristianity Today)’의 ‘이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저술가’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이야기 내용은 이렇습니다.
‘웸믹’이라고 불리는 ‘작은 나무 사람들’의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로에게 금빛 별표나 잿빛 점표를 붙이며 하루를 보냅니다. 재주가 뛰어나거나 잘생긴 웸믹들은 항상 금빛 별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이기도 한 ‘펀치넬로’처럼 보잘 것 없는 웸믹들은 잿빛 점표를 받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금빛 별표를 자랑하며, 더 많은 별표를 받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반면에 잿빛 점표를 받은 사람들을 업신여기며 조롱합니다.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특별해… 머리가 좋고, 잘생겼고, 똑똑하니까 말이야.”
온통 잿빛 점표로 가득한 펀치넬로는 조롱당하고 마을에서 쫓겨납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나무사람들을 만든 목수 ‘엘리’(하나님을 상징)가 편치넬로에게 말합니다. “너는 너이기 때문에 특별하단다. 특별함에는 어떤 자격도 필요 없으며, 너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하단다.”
2권에서는, 작은 나무 사람인 웸믹들 사이에 상자와 공을 남보다 많이 사 모으려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상자와 공이 많으면 훌륭한 웸믹, 적으면 별 볼일 없는 웸믹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주인공 ‘펀치넬로’도 훌륭한 웸믹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집도 팔고, 잠도 안자고 오직 일만 해서 상자와 공을 사 모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웸믹들은 항상 더 많이 가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상자와 공을 많이 모으면 과연 행복해질까요? 오히려 어리석은 경쟁을 하느라 소중한 것들을 잃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목수 아저씨 ‘엘리’는 펀치넬로에게 말합니다.
“네가 가진 것 때문이 아니라, 넌 너이기에 행복할 수 있단다. 잊지 마렴, 넌 언제나 특별하며, 난 널 사랑한단다.”
이 이야기는 아이들의 열등감을 없애고, 자존감을 높이며, 자신을 더욱 사랑하게 만듭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동화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특별함에는 어떤 자격도 필요 없으며 오직 나를 존재하게 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만 필요합니다. 우리 사람들이 많이 생각하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나 하나를 위하여 사람이 되셨고, 대속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만큼 나는 하나님께 아주 특별한 사람입니다. 내가 재능이 있고, 돈이 많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특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주십니다. 로마서 8:17절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현대어성경,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께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분의 재산을 분깃으로 나누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만일 우리가 그 아들의 영광을 함께 누리기를 바란다면 그분의 고난에도 함께 동참하는 게 마땅할 것입니다.”) 디도서 3:7절입니다. “우리로 그의 은혜를 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들에서 사용한 “상속자”라는 이 한 단어에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베푸시는 모든 은혜가 축약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이 로마서 8:32절에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사랑하신 자녀들에게 이미 모든 것을 다 허락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특별한 신분과 능력을 알지 못한 채, 세상에서 모든 것을 허비하고 쥐엄 열매나 껄떡거리는 하급 인생으로 살아갑니다. 왜 이렇게 허무한 인생으로 삽니까? 이유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의 믿음과 가치관으로 인생을 만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힘, 능력, 돈, 지식 등 이런 것들을 의지하면 탕자의 꼴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으로 순종하고 실천한다면 날마다 기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적이라고 하니 뭐 대단한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사실 이 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면 그것이 곧 기적입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봅시다. 요한복음 14:12-1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이 약속을 믿고 진심으로 주님께 구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단,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와서 고백했던 것처럼, 진실한 믿음을 잊지 마십시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격한 환영과 함께 모든 신분을 회복시키셨습니다. 비록 우리도 탕자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진심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도 이 탕자처럼 신분과 믿음의 자리를 온전하게 회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든 약속과 능력을 소유하는 복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