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최상의 자존감을 유지하십시오.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2,381회 작성일 2020-10-08 12:55
*** 최상의 자존감을 유지하십시오. / 사도행전 4:13-21
 
 사도행전 4:13-21,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요즘 생활에 활기가 있습니까? 우리 사람들은 때때로 무기력해지거나 살아야 할 의미가 희미해 질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때에 이런 생각이 듭니까? 아마도 나 자신의 존재감이 없을 때에 산다는 것이 의미 없고 무기력해지리라 생각됩니다. ‘존재감이 없다.’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심지어 어린아이에게도 ‘자존감(自存感)’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은 ‘스스로를 높이는 표현인 자존심(自尊心)’과는 다르며, ‘자신이 스스로 살아 있다고 느끼는 감정’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자존감이 도가 지나쳐서 교만이 더해지면 자존심(自尊心)이 되고, 자만심(自慢心)이 됩니다. 자만이란 ‘자신이나 자신과 관계가 있는 것을 스스로 뽐내며 자랑하여 거만하게 구는 것’을 뜻합니다. 이 자만심의 대표적인 표현은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내가 하겠다.’고 하는 ‘자기경영’입니다. 그래서 이 자만심은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미워하시고 대적하시는 불신앙의 대표가 됩니다. 이 자만심의 대표적인 사건이 바벨탑입니다. 창세기 11:4절입니다. “또 말하되 , 성음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하였더니” 이것이 인간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즉 스스로 자신의 것을 경영하려는 의지입니다. 자신의 것을 스스로 경영하려는 것이 잘 못된 것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만큼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기 경영은 분명히 교만이고 죄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확실하게 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영적인 자존감’입니다.
 
어느 부부가 병원의 정신과를 찾아와서 의사에게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이유는 부인이 입원해야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남편에게 그렇게 된 이유를 물었습니다. 남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의가 좋았습니다. 어느 날,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하다가 저에게 대드는 아내에게 화가 나서 무심코 던진 말 때문입니다. 제가 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너 같은 인간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아내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사람들로부터 “너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라는 대우를 받게 된다면 살아갈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너는 정말 쓸모가 없구나.”라고 하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이건 죽을 맛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경고를 받지 않으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영적인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이적을 행하는 일을 시기하여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면서 큰 이적도 나타났습니다. 이를 경험한 수많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을 보고받은 제사장 무리와 사두개인들 즉 당시 유대교 지도자 그룹들이 모여 회의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이대로 두었다가는 백성들을 다 빼앗기겠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은 공회를 열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와서 심문을 했습니다. 본문 앞쪽의 7절입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여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언했습니다. 제사장 무리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대부분이 어부 출신이거나 변변한 학문조차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을 아는데, 너무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하며 또 기적을 통하여 병 나은 사람도 눈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제사장 무리들은 반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골방에서 문을 다 걸어 잠그고 숨어있었습니다. 이랬던 제자들이 어떻게 이렇게 담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유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직접 보았고, 자신들도 부활의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분명한 영적자존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말세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분명 담대한 영적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 영적 자존감이란 무엇입니까?
 
기독교 초기 역사에 로마의 네로 황제를 비롯한 열 명의 황제 시대에 기독교는 극심한 박해를 겪었습니다. 당시의 순교사화를 보면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는 거의 매일 기독교인들을 처형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잡혀온 기독교인들을 경기장 밖에 줄지어 놓고 2-30명씩 경기장에 넣고는 굶주린 맹수들을 풀어 먹이로 삼거나, 경기장에 기둥들을 세우고 기독교인들을 묶어 화형을 시키며 구경했습니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경기장 밖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기독교인들의 줄이 줄어들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나도 그리스도인이다.’라면서 그 줄에 합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택했겠습니까? 이유는 영적자존감이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백성으로써 부활의 영광을 믿었던 것입니다. 본문 19-20절에서 사도들도 제사장 무리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며 죽음을 불사하는 담대함을 보였습니다. 사도행전 5:40-41절입니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제자들이 채찍질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예수님 이름으로 당하는 고난을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도를 담대하게 하는 영적 자존감이란 ‘자신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부활의 소망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1:13절에서 가이사랴의 성도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체포될 것이라는 말을 하면서 만류했을 때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사도 바울이 이렇게 박해와 죽음 앞에서도 담대했던 것은 역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영적인 자존감’이었습니다. 지금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서 손해를 보거나 억울하게 욕을 먹으면서도 인내하며 세상과 구별된 영적인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것도 영적인 자존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5:18-19절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이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의 영적자존감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분명한 인식입니다.
 
※ 어떻게 영적자존감을 최상으로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술피시우스와 세베루스의 대화’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집트의 한 수도원에 어떤 남자가 찾아와서 수도원에 입회하기를 간청했습니다. 수도원장은 그에게 ‘수도원의 으뜸가는 규칙은 복종인데 지킬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는 ‘어떠한 명령이라 할지라도 행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수도원장은 즉시 그 사람에게 말라버린 버드나무 막대기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막대기를 땅에 심고 막대기에서 잎이 날 때까지 물을 주라.” 수도원장의 억지 같은 명령이었지만 새로 들어온 수사는 매일 거의 십리나 떨어진 나일 강까지 걸어가서 물을 지고 와 마른 막대기에 물을 주었습니다. 일 년이 지나서 그는 약간 지쳤지만 성실히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또 일 년이 지났습니다. 그는 계속 그 일을 쉬지 않고 해냈습니다. 3년째 접어들었지만 그는 막대기에 물을 주기 위해 여전히 나일 강을 왕복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느 날 갑자가 막대기에 싹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순종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영적자존감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자신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부활의 소망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임을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0:25-29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전하고 가르치셨던 말씀을 듣는 사람들과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만, 속하지 않은 사람은 듣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듣는다.”는 표현은 구약에서 많이 사용하는 ‘청종’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즉 ‘말씀을 듣고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영적자존감을 계속적이고 최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길은 주님을 따르는 것 즉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가?’라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말입니다. 하지만 신학생들에게 물어도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순종하고 따를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면서 이적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시기한 유대교의 고위관리들은 제자들을 박해하며 살해위협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한 말이 주님을 따르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신하지 못했을 때는 유대인관리들이 두려워 방문까지 걸어 잠그고 숨어 지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는 하나님 나라와 부활의 권능을 확신하고 죽음조차 무서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영적자존감이 최상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박해나 위기는 없지만 올바른 신앙을 지켜가기 위한 실천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즉 베드로와 요한이 권력자들 앞에서도 자신의 신앙의 소신을 지킨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신앙의 소신을 지켜야 합니다.
 
유대권력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어찌하지 못하고 위협하고 놓아준 이유를 보십시오. 본문 21절입니다.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백성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말씀에서는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 거지를 고쳐준 이적을 백성들이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과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삶을 닮은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얻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최상의 영적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삶을 닮은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날이 점점 가까워지는 이 때를 사는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자 영적자존감을 최상으로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최상의 영적자존감을 유지하게 되면 이 세상의 어떤 세력도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눈이 세상을 향하게 되면 두려움과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집니다. 비록 세상에서 살지만 ‘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이다.’라는 영적자존감으로 날마다 세상을 이기시는 복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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