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까?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3,587회 작성일 2018-12-27 22:07
***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까? / 마태복음 5:21-26
 
마태복음 5:21-26, “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 평안하십니까? 옛날 먹고살기가 힘들 때, 세상이 흉흉하여 평안하지를 못할 때에는 인사말이 ‘안녕하십니까?’라고 했습니다. 지난 밤사이 별일 없었는지, 그동안 못 본 사이에 별고는 없었는지를 묻는 것이겠지요. 정말 고난이 많았던 민족이었던 유대민족도 인사말이 ‘샬롬’입니다. 많은 억압 속에서 갈망하던 ‘평안’과 ‘평화’가 한(恨)처럼 가슴에 맺혀 있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은 평화, 평안, 안전한 삶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사말이 지금 다시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이 모든 인간 고통 두려움뿐 그 지겨움 끝없네.’이런 복음송 가사처럼 매일 들려오는 소식들은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가슴 조리게 합니다.
 
우리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하나님께서 등을 돌리시고 침묵하셨습니다.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였던 말라기 이후로 400여년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침묵하셨습니다. 아무리 구하고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이사야 59: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의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이 시대와 너무나 닮아 있는 지금 우리의 시대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졌고 세상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정도를 넘어 적극적으로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성경에 예고된 대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환난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무엇과 평화를 이루어야 하며 어떻게 평화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초반부를 이루면서 우리의 삶에서 평화를 이루어야 할 방법과 이유를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과의 관계에서 평화해야 함을 율법을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형제에게 화를 내고, 욕을 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멸시하는 것은 불화(不和)를 의미하며 그 결과는 심판과 지옥행이라고 하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과의 불화는 하나님과의 불통(不通)을 이룬다고 경고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 사람과의 화목을 먼저 이루라고 하십니다. 이는 사람 사이의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12:1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무서운 경고입니다. 사람과의 평화를 이루지 못하면 하나님을 볼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처음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 받은 에베소 교회를 생각나게 합니다. 요한계시록 2:4-5절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이 말씀도 무서운 경고입니다. 사랑을 잃어버리면 버림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평화는 함께 가는 동행자입니다. 사랑 없이는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 우리가 평화를 이루어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평화를 이루어야 할 대상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나 자신과의 평화, 다른 사람과의 평화, 하나님과의 평화, 이렇게 셋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근본적이면서 먼저 이루어야 하는 것은 자신과의 평화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도 말하기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다스리고 가정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려야 세상을 평정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3-5절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주님께서는 ‘자기 스스로도 자신을 알지 못하고 허물이 있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허물을 탓하겠는가.’라고 하시면서 ‘먼저 자신을 알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알고 자신과 평화합니까? 자신과 평화를 이룬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야고보서 1:6-8절을 봅시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이 말씀은 자신 안에서 하나를 이루지 못하여 불안정함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의심한다는 것은 곧 불신(不信)이며 자신의 마음에서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속된 말로 ‘긴가민가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하나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과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평화는 하나를 이룰 때에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 안에서 하나를 이루게 되면 ‘확신(確信)’이 생깁니다. 이 확신은 무슨 일을 하든지 담대하게 하며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께 대하여 확신 있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이렇게 자신 안에서 하나를 이루었다면 같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여야 합니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한지를 본문말씀에서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본문 22절을 봅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마음이 듭니까?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형제에게 화 한 번 안낸 사람 있을까요? “노하는 자”라는 말은 ‘까닭 없이 화를 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조금 더 확대하면 에베소서 4:26절의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는 말씀처럼 오래 지속한다거나 죄로 연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라가”라는 말은 ‘바보’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인 것 같은데, 아람어에서의 뜻은 ‘무가치한 자’라는 말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의미입니다. “미련한 놈”이라는 말은 인격적인 모독을 주는 말입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에 대하여 별일도 아닌데 화를 내고 이 때문에 다른 죄로 연결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됩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쓸데없는 놈’이라고 정신적인 모멸감을 주는 것은 정죄를 당하게 됩니다. 가장 강력한 것은 인격적인 모독을 주는 것인데 이는 지옥에 버려지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사람과의 관계는 화목을 이루는 평화여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19절에서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9절에서는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고 하시며, 3:15절에서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하십니다.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평화는 두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본문 23-24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의미합니다. 사람과의 평화가 없이는 하나님과의 평화도 없습니다.
 
워치만 니(Watchman Nee)가 쓴 책 가운데 ‘좌, 행, 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앉으라, 걸으라, 뛰라.’는 뜻입니다. 그가 이 글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걷거나 뛰거나 하기 전에 먼저 앉아서 쉬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의지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제멋대로 이리 저리 분주하게 다니고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포로에서 돌아온 후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방해와 여러 난관에 부딪쳐서 오랫동안 성전 재건을 미루어왔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학개 1:4절입니다.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옳으냐?”고 하시면서 “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9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10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이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은 황폐하여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의 집을 그럴듯하게 짓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는 모든 일에 재앙을 내렸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열중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평화하지 못하고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들이 뒤틀리고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4-5절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옛 어른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사람이 일을 할 때에는 일머리를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일의 순서를 알아서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 해야 할 것을 잘 분별하여 순서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의 순서가 바뀌면 힘들기도 하겠지만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도 그러합니다. 본문 23-24절이 바로 이 점을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지금 예배하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과 평화합니까? 다른 사람들과 불화하여 원망들을 만한 일은 없습니까? 만일 이 두 평화를 이루지 못하였다면 지금의 예배도 아무른 의미가 없습니다. 요한일서 3:21-23절을 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화평한 삶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본문 앞쪽의 팔복 중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오신 예수님이 이제 곧 다시 오실 때에는 심판의 주로 오실 것입니다. 심판이 이르기 전에 우리 마음에 평화를 이룹시다. 화평함과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는 말씀을 잊지 마시고 사랑과 평화를 주님을 만날 때까지 지켜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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