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지금은 행동해야 할 때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4,311회 작성일 2018-11-14 22:41
*** 지금은 행동해야 할 때 / 요한복음 11:5-16
 
 요한복음 11:5-16,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16 디디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하더라.
 
** 들어가는 말
 
오래전 월남전이 한창일 때였습니다. 미국 켄터키 주 ‘아이솜’에 있는 한 어머니에게 월남전에 참전하고 있는 아들 ‘라리 매가드’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내용 중에 아들이 쓴 기도시가 있었습니다. 그 시를 읽는 중에 아들이 전사했다는 전보를 받았습니다. 그 시의 내용입니다.
“주 하나님! 이전에는 한 번도 당신께 말씀드린 적이 없지만 지금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계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바보같이 나는 그것을 모두 믿었습니다. 그런데 간밤에 구멍 난 창구를 통해 당신의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들이 거짓말쟁이들임을 깨달았습니다. 왜 그동안 당신이 만드신 것들을 볼 시간이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젠 제 손을 잡아 주시겠습니까? 당신의 얼굴을 직접 대하기 전에 이 지옥 같은 곳에 온 것이 재미있습니다. 오늘 당신을 뵌 것이 무척 기쁩니다. 곧 0시가 됩니다. 그러나 당신이 가까이 계심을 안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당신을 만난 후로는."
 
이 청년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것일까요? 어떻든 정말 행운아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았었는데 죽음 며칠 전에 하나님을 깊이 확신하고 신뢰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다른 한 편에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강도에게 주어진 행운 같습니다. 로마서 4:6-8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의 은혜가 이 청년이나 십자가상의 강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죄의 은혜가 지금 우리에게도 주어져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이 사명은 반드시 나 자신의 수고로움과 노력이 담긴 행동으로 완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모하고 기다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바란다면 이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생각에 대하여 코웃음을 치며 비웃습니다. 베드로후서 3:3-5절입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런 말에 속으면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15:33-34절에서 사도 바울은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삶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잘 알려진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예수님의 이적 이야기입니다. 하나의 이적 이야기치고는 긴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고자 하시는 내용이 많고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질병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부활에 대하여’, ‘생각의 관점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등 중요하고도 뜻 깊은 주제가 많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일할 시기에 관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다른 관점을 조명해보려 합니다.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에는 예수님께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세 남매의 가정이 있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와 오빠인 나사로 세 남매였습니다. 그런데 가정의 기둥이자 가장 역할을 했던 오빠인 나사로가 심한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다급한 자매는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빠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고쳐주시기를 바랐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듣고서도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시고는 그대로 이틀을 더 계셨습니다. 그 사이에 나사로는 죽었고, 이미 장례까지 치렀습니다. 그제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며 나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자고 하셨을 때 제자들이 펄쩍 뛰면서 만류했습니다. 제자들은 “선생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대 인들이 돌로 치려고 했는데 또 그리고 가시려합니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계획을 제자들이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해하지를 못하자 예수님께서 확실하게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제자인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이는 전혀 예수님께서 주도하시는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이런 상황은 동문서답(東問西答), 우이독경(牛耳讀經)이라는 표현이 적절합니다. 혹 지금 내가 그렇지는 않겠습니까?
 
※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때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소식을 듣기 전에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그대로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그 사이에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후에 출발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야속한 분입니다. 나사로가 병든 것을 미리 알고 계셨으면서도 가지 않으셨습니다. 소식을 들었을 때에라도 가셨더라면 자매의 애타는 마음이 덜 했을 것입니다. 자매는 그 며칠 동안 얼마나 애타게 주님을 기다렸겠습니까? 그래도 세상에서 의지가 되던 오빠였는데, 자신들만 남겨진다고 생각하면 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환경은 자매가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힘든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렇게 여유롭게 시간을 끌고 계셨겠습니까? 이유는 ‘때’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즉 나사로의 죽음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우리가 반드시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생각이나 환경에 의하여 뜻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모든 일을 친히 계획하시고 시행하시는 절대주권자시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33:2절에서 선언하십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때를 주관하시는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멈추어야 할 때와 나아가야 할 때, 일할 때와 쉴 때 등. 우리의 행동은 모두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야 합니다.
 
‘때’라는 말은 헬라어로 chronos라고 하며, 영어로는 time 으로 번역합니다. 이는 ‘기회’라는 의미로서 ‘엄밀한 의미에서 고정된 시간’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기겁을 했습니다. 조금 전에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하여 도망 왔었는데 얼마나 지났다고 다시 가자는 것입니까? 제자들의 이 표현은 ‘지금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유대로 가서 일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은 우리가 일을 해야 하는 낮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이라는 말은 ‘일할 수 있는 때, 일할 수 있는 기회, 환경, 상황’등을 의미합니다. 이 의미를 잘 살린 찬송가가 330장의 “어둔 밤 쉬 되리니”라는 가사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과 제자들이 서로 상반된 주장을 했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시간을 보셨고, 제자들은 세상적인 환경과 상황을 보았습니다. 이와 유사한 경우가 엘리사 선지자와 그의 사환의 이야기에 나옵니다. 아람 군대가 엘리사 선지자가 사는 도단 성을 겹겹이 에워쌌을 때였습니다. 아침에 사환이 그 광경을 보고 기절할 듯이 놀라서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라고 엘리사 선지자에게 떨며 말했습니다. 그 때 선지자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사환의 눈을 열어 보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영의 눈이 열린 사환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천사들이 함께 한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세상의 환경과 상황에 빠져들면 두려움이 엄습하여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거짓과 불법이 난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때를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사탄과 그 하수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때를 분별하지 못하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훼방합니다. 앞 서론에서 보았던 베드로후서 3:3-5절입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렇게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시간을 분별하지 못하도록 훼방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조차 세상의 환경에 마음이 둔하여져서 하나님의 시간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시간과 때를 알려면 말씀과 기도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깨어있다는 것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교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깨어 있지를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오천 명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바람과 물결도 순종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을 해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으로 숨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우리에게로 향하신 하나님의 시간을 알지 못하면 엉뚱한 일에 생명만 낭비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모든 정황으로 볼 때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즉 자신의 믿음을 총동원하여 시대를 살피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지혜롭게 수행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환경을 두려워하여 숨거나 엉뚱한 행동을 할 때가 아닙니다. 물론 사람은 환경과 여건을 보면서 일을 가늠합니다. 즉 사람의 관점은 눈에 보이고 이해되는 환경과 상황과 여건에 의하여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도 ‘아들을 주겠다.’고 하신 시기가 불가능한 관점으로 생각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 세계의 관점인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4:13절에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합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어둠의 세력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때에 믿음을 시험하는 극한 시련이 올 수도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육신의 생명을 버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멀어지십시오.
 
여러분에게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이 자신의 불신으로 인하여 늦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는 능력의 주님이 함께 하시며 이 시대를 두려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행하여야 할 긴급한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 속에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계시면서, 우리가 이해하는 환경과 상황과 여건을 초월하여 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나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해를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의 시대는 진정한 분별을 필요로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교통하면서 하나님의 시간을 깨닫고 믿음으로 행동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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