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사람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0,769회 작성일 2018-11-07 22:13
***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사람 / 사무엘상 14:6-15
 
사무엘상 14:6-15, “6 요나단이 자기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 무기를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하여 따르리이다.’ 8 요나단이 이르되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이리니 9 그들이 만일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하면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에게로 올라가지 말 것이요. 10 그들이 만일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넘기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 하고 11 둘이 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이매 블레셋 사람이 이르되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들이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12 그 부대 사람들이 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보여줄 것이 있느니라.” 한지라. 요나단이 자기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느니라.’ 하고 13 요나단이 손발로 기어 올라갔고 그 무기를 든 자도 따랐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지매 무기를 든 자가 따라가며 죽였으니 14 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가 반나절 갈이 땅 안에서 처음으로 쳐 죽인 자가 이십 명 가량이라. 15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 들어가는 말
 
사람은 저마다 성격과 자질이 다릅니다. 한 배에서 나온 한 형제자매라도 성격은 제 각각 다릅니다. 쌍둥이도 다르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생각할 때에 적극적입니까? 소극적입니까? 옛말에 ‘감나무 아래 누워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랴.’고 했습니다. 이는 감을 딸 생각은 하지 않고 감나무 아래에 누워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소극적이든지 게으른 사람의 행태를 꼬집는 말입니다. 성경말씀에는 하나님의 성품 중에 ‘열심’이라는 표현이 가끔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왕하 19:31, 사 9:7) 이런 표현이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시는 모습은 열정으로 가득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경내의 장사꾼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로 가득한 것을 보시고 이들을 몰아내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제자들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요한복음 2:17절입니다. “제자들이 성경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처럼 하나님은 열정으로 가득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열정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을 좋아하시겠지요? 그래서 로마서 12:11절에서 사도 바울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이제 2018년도 두 달을 남겨놓은 시점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명이 빠르게 소멸되는데 허송세월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의 행동을 보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살펴보려합니다. 왜냐하면 요나단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파장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이 말씀의 마지막 부분인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는 이 말씀을 달리 “하나님이 떨리게 하심이었더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즉 요나단의 하나님을 신뢰한 담대한 행동이 적진뿐만 아니라 땅까지도 진동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담대하게 나아갈 때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 본문말씀이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움을 받고 블레셋과의 처음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블레셋은 대군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치러 와서 믹마스에 진을 쳤습니다. 사울은 아직 출전을 하지 못하고 길갈 진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는 사무엘 선지자가 ‘자신이 와서 하나님께 제사할 때까지 7일을 기다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병사들은 블레셋의 대군을 두려워하여 도망하거나 숨는 사람이 허다했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진 사울 왕은 사무엘이 정한 일주일이 지났음에도 오지를 않자 자신이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를 마치자마자 사무엘이 도착했고 ‘왕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며 심히 책망했고,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시고 마음에 맞는 사람을 지도자로 삼으셨다.’(3:8-14)고 했습니다. 사무엘은 그 길로 기브아로 떠나버렸고 블레셋 군대는 여러 갈래로 이스라엘 진영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사울 왕은 어찌할 바를 몰라 기브아에 머물지 못하고 그 성읍의 변경 지대인 구석진 석류나무 아래에 진을 쳤습니다. 군사들은 다 도망하고 육백 명만이 사울과 함께 있었고 그나마 군사들에게는 무기조차 없었습니다. 두려워진 사울 왕은 제사장과 하나님의 궤를 모셔 오도록 실로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기럇여아림에 있던 제사장 아히야가 하나님의 궤를 모시고 기브아 진영으로 왔습니다. 아마도 사울 왕은 하나님의 궤가 진영에 들어옴으로써 힘을 얻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깨닫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했으면서 하나님의 궤가 자신의 능력이 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불신앙과 불순종, 두려움에 떨던 사울 왕과는 반대로 그 아들 요나단은 용감하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인 사울 왕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속된 말로 “개천에서 용이 난 것”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지키실 것이란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적진으로 들어갔습니다. 블레셋 진영은 산 위에 있는 난공불락의 천연 요새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자신의 무기를 든 자와 함께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면서 담대하게 나아갔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요나단이 자기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왕과 군사들이 구석진 곳에 숨어서 하나님의 궤를 기다리며 요행을 기다리는 동안 요나단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열정으로 행동한 것입니다.
 
※ 하나님을 신뢰하는 열정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룹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잠언 16: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알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의미 없이 지어진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싫든지 좋든지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지음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런데 가장 고귀하게 지음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이 사실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전도서 7:29절입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그리고 잠언 1:31절에서는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이 너무 마음 아프셔서 탄식하셨습니다. 이사야 1:2-3절을 봅시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하나님이 지으신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데, 가장 귀하게 지음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나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복음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이시며 돌아오기를 열망하셨습니다. 이사야 30:18절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의 이런 열망을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은전, 탕자의 비유를 통하여 거듭 거듭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겠습니까? 본문말씀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요나단의 행동 속에서 그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앞서 본문말씀의 배경을 설명했듯이 사울 왕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의 대군을 만나 두려움에 떨면서 도망하고 구석진 나무 아래에서 숨을 죽이며 숨어 있었습니다. 이 답답한 현실을 본 요나단은 자신의 무기를 든 자와 함께 분연히 일어나서 적진을 향했습니다. 요나단의 고백을 봅시다. 본문 6절입니다. “요나단이 자기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요나단이 대군을 상대로 하여 싸우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에도 못 미치는 지극히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의 마음에는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요나단은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했습니다. 요나단은 자신 앞에 펼쳐져 있는 상황도 환경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경외하고 신뢰하는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자신의 아버지인 사울 왕처럼 요행을 기다리며 숨어 있지 않았습니다.
 
오래된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일생동안 문 안으로 들어가기를 바랐지만 들어가지 못하고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죽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번도 문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문밖에서 서성거렸습니다. 그러다가 죽을 무렵이 됐을 때 용기를 내어 문지기에게 물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문을 지키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러자 문지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반가운 기색으로 말했습니다.
“이 문은 당신의 문입니다. 당신이 말하면 문을 열어 드리려고 지금까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이미 인생은 다 끝나고 때는 지나가버렸습니다. 만일 문지기에게 열어달라고 부탁하거나 열어보려고 노력만 했더라도 벌써 그 문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절로 문이 열리기만을 바랐기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인생의 문이 열리기만을 바라며 막연하게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삶을 사는데 내가 선택하지 않고, 내가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아무 짓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것은 나이를 먹고 늙어가는 것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이렇게 시도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후회하면서 삽니다. 그래서 요즘 인터넷 SNS에는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요나단 앞을 가로막고 있는 블레셋 진영은 손발로 기어서 올라가야 할 만큼 가파른 산 위에 세워진 견고한 산성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했던 요나단에게는 장애물이 아니라 기회의 문이었습니다. 본문 10-12절을 봅시다. “그들이 만일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넘기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 하고 11 둘이 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이매 블레셋 사람이 이르되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들이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12 그 부대 사람들이 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보여줄 것이 있느니라.” 한지라. 요나단이 자기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느니라.’ 하고” 요나단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는 요나단의 앞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의 하나님을 신뢰한 믿음의 파장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본문 14-15절입니다. “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가 반나절 갈이 땅 안에서 처음으로 쳐 죽인 자가 이십 명 가량이라. 15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이 말씀에서 “반나절 갈이 땅”이란, 두 마리의 황소가 반나절에 경작할 수 있는 약 2㎢(약 600평)의 넓이를 말합니다. 요나단이 요새에 침투하여 600평 정도의 땅을 지나면서 20명가량의 군사를 죽였습니다. 아마도 블레셋 군사들은 대단한 용사가 침투한줄 알았을 것이고 공포에 떨었으며 군사들이 우왕좌왕하면서 뛰어 다니는 것이 땅이 진동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적군들로 두려워 떨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열정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미국 여류저널리스트인 ‘헬렌 롤랜드(Helen Rowland, 1875~1950)’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이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기회가 있을 때 저지르지 않은 행동이다.” 그러면 행동을 하기에는 애매한 때에는 어떻게 할까요?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했을 때 자신의 신앙을 시험했습니다. 본문 8-10절입니다. “요나단이 이르되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이리니 9 그들이 만일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하면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에게로 올라가지 말 것이요. 10 그들이 만일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넘기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 하고” 하나님께서는 요나단의 믿음에 뜻을 보여 주셨습니다. 옛 속담에도 “뜻이 있는 곳에는 길이 있다.(Where there's a will, there's a way.)”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1:2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우리도 요나단처럼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열정으로 행동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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