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본향을 사모하십니까?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4,195회 작성일 2018-07-31 14:09

*** 본향을 사모하십니까? / 히브리서 11:13-16

 

히브리서 11:13-16,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들어가는 말

 

모태본능(母胎本能)이라는 말이 있지요? 아이들에게는 평화롭고 안전했던 엄마의 자궁을 그리워하는 모태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디든지 작은 공간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고 자기만의 공간을 가지려합니다. 조금 더 자라면 자신이 자라났던 고향을 마음에 품게 됩니다. 회귀본능을 가지고 있는 동물들처럼 말입니다. 회귀본능이란 동물, 특히 연어 같은 물고기들이 태어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성장하고 산란(産卵)을 위하여 태어난 곳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습성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도 이런 고향회귀본능이 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고, 나이가 들수록 옛날에 먹든 음식이 그리워지고, 고향이 그리워지고, 흙이 좋아지는 것 등. 이런 것이 고향회귀본능을 나타냅니다. 옛날에는 칠십 고개를 넘으면 여든을 바라본다고 해서 71세를 망팔(望八)이라고 했습니다. 옛 노인들은 망팔이 되면 넋두리 삼아 이런 말을 했습니다. “흙냄새가 고소하게 느껴지니 어서 저 흙으로 돌아가련다.” 이는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회귀본능입니다. 이것은 누군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게 되고 본능적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으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이치입니다. 전도서의 결론에서 “너는 청년의 때에 너희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고 하면서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고 하십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영적본향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과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6절에서도 믿음의 사람들이 사모하던 것이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우리는 비록 육신이 이 땅에서 살지만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향은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험한 세상을 사는 우리들에게 흔들리지 않도록 요한복음 14장에서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려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우리는 이렇게 분명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천국본향을 사모합니까?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내용 안에 들어 있습니다. 본문말씀에 등장하는 “이 사람들” “그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본문에 나오는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등의 믿음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았고 믿음 안에서 죽었지만 우리들처럼 부활의 영광을 약속 받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나그네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나그네라고 하는 말 속에는 자신이 돌아갈 고향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베드로전서 1:17절입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이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에 두려움으로 지내라.” 그리고 2:11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나그네의 삶이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은 비록 부활의 약속을 받지 못했지만 영적인 본능으로 본향을 사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한 성” 곧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준비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1:10-11절입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되고 있습니다.

 

※ 나는 진정으로 영적본향을 사모합니까?

 

유대인들에게는 선민정신이 있다면, 그리스 전통 중에는 노스텔지어(nostalgia)정신이 있습니다. 노스텔지어라는 말은 고향이라는 말의 nostos와 그리움이라는 말의 algia가 합해져서 향수(鄕愁, 고향을 그리는 마음)의 뜻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으로는 채울 수 없는 근원적인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탁월한 기독교 변증학자인 C.S.루이스는 이 그리움을 영어로는 정확히 표현할 수 없어서 독일어 ‘젠주흐트’(Sehnsucht)를 사용했습니다. ‘젠주흐트’는 ‘그리워하다’, ‘동경하다’라는 뜻에서 비롯된 ‘Sehn’과 ‘sucht’의 결합어입니다. 루이스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는 잠재울 수도, 가라앉힐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는 강렬한 갈망을 ‘젠주흐트’로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갈망의 정체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갈망은 ‘영원에 대한 그리움’,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이처럼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욕구, 즉 영적본향본능의 그리움이 있습니다. 이 본능은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원초적인 그리움입니다. 전도서 3:11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지금 자신의 마음을 가장 정직하게 살펴보십시오. ‘나는 진정으로 영적본향인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가?’ 저는 때때로 나 자신과 내가 아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정말 본향으로 가고 싶기는 할까?’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 같기는 한데 그 삶의 모습이 전혀 변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변화가 없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을 만남으로서 가치관이 바뀌고 삶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이는 불티가 위로 나는 것처럼 너무나 분명하고 자명한 사실입니다. 내가 주인이던 자리에 예수님이 앉으시면 내 중심으로 생각하던 것이 모두 예수님 중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어떨 때는 억지로 주님을 외면해보려고 해도 그럴수록 내 양심은 더욱 주님을 의식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도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남 유다가 멸망할 때에 활동했기 때문에 남 유다의 죄악과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자신까지도 괴롭히는 것 때문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노릇을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20:9절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 너무 괴로워서 더 이상 못하겠다고 외면하니까 오히려 가슴이 불붙는 것 같아 답답해서 견딜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옛말에 ‘물고기는 물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영적본향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쫓아가는 것은 물고기가 물 안이 답답하다고 물 밖으로 나가겠다고 고집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치가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좋은 집을 가지고, 어리석은 부자처럼 노후대책을 철저히 해서 죽을 때까지 쓰고도 남도록 모아놓았다고 해서 인생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디모데전서 6장에서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6-8절을 먼저 봅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자기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현실에 대하여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17-19절입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한 마디로 ‘세상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을 사모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혹시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한데 지금 현실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전에 신앙상담을 할 때에 ‘사업하시는 분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 고심하는 일’로 상담했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므로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라.’고 했었습니다. 그 때 그 분은 ‘자신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진취적으로 나아가고 믿음으로 쟁취하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이 지금은 자신의 뜻대로 사업을 잘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혀 사업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2:5-8절을 봅시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이 땅에 자신의 것을 쌓아놓으면 어리석은 부자처럼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누가복음 12:19-21절입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리라”

 

진정으로 영적인 본향을 사모한다면 반드시 자신의 삶에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마치 연인들이 서로를 향한 진정한 사랑이 여러 가지 배려로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하더라도 행동으로 아무런 배려도 표현도 없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영적본향을 사모하는 삶은 혼자서 가기에는 많이 힘듭니다. 두 사람 내지 여러 사람이 함께 간다면 서로를 격려하고 이끌어주고 밀어주는 사랑의 힘으로 이겨내기가 쉽습니다. 히브리서 10:23-25절입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마지막 때에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예전에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 중에 ‘삼총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소설가인 ‘뒤마’의 작품인데 이들이 사람을 사로잡는 구호가 하나 있습니다. ‘All for one, One for all’ '하나는 모두를 위해, 모두는 하나를 위해' 라는 구호입니다. 우리 믿음의 공동체가 이런 마음으로 하나가 된다면 본향에 이르기가 좀 더 수월할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자그마한 사막 동물 중에 ‘미어캣’이 있습니다. 집단생활을 하는 이들은 천적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조심성이 무척 많으며 먹이활동을 할 때면 반드시 보초병을 세웁니다. 다른 개체들이 먹이 활동을 하는 동안에 보초병은 조금 높은 곳에서 뒷 두발로 우뚝 서서 위의 독수리로부터 뱀과 다른 맹금류의 접근을 철저하게 감시합니다. 그러다가 조그마한 위험이라도 생기면 즉시 소리를 내어 경고합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다른 개체가 천적과 싸우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를 버리지 않고 전부가 힘을 합하여 보호하고 함께 싸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마리는 전체를 위하여 희생하고, 전체는 한 마리를 위하여 희생하는 정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영적본향본능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사는 이 육신의 세상은 우리 영의 본향이 아닙니다. 잠시 머물다가 떠나야 하는 타향이며 나그네로 지나는 곳입니다. 세상 일에 빠져서 영원한 하늘 본향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우리 중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고 하늘 본향에 이르도록 서로 격려하고 이끌어주면서 끝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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