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3,460회 작성일 2018-07-17 22:09

***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 / 마가복음 9:38-42

 

마가복음 9:38-42,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 들어가는 말

 

매일 배달되는 인터넷의 ‘따뜻한 하루 편지’에 이런 글이 올라왔습니다. 마라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라톤은 긴 시간 동안 자기 자신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힘들고 고독한 스포츠 경기 중에 하나입니다. 때로는 순위보다도 42.195㎞를 완주한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기도 하는 스포츠이지요.

그런데 2013년 4월 28일. 영국 선덜랜드에서 열린 마라톤 풀코스 경기에서 오천여명이 달렸는데 한 명만 뺀 나머지 모든 선수가 실격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오천여명의 경주자는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완주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시작은 2위로 달리고 있던 선수가 지정된 코스를 잠시 벗어나 달렸다가 다시 원래 코스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2위 선수는 자신이 잘못 달렸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2위 선수를 뒤쫓던 나머지 선수들도 모조리 잘못된 코스로 달렸다는 것입니다.

주최 측이 경로 표시를 확실하게 하지 않았다는 문제도 있었지만, 아무 생각 없이 앞사람만을 따라가던 5,000명이 선수들은 전체 42.195㎞에서 고작 264m를 덜 뛰게 되어 결국 모두가 실격처리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줄곧 선두를 달리고 유일하게 정확한 경로를 따라서 간 ‘마크 후드’ 선수가 우승 및 유일한 완주 자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어이없고 실소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제일 앞 선 사람은 정상적인 코스로 먼저 달려갔고, 거리가 떨어졌던 2위는 길을 잘 못 선택하여 코스를 벗어났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코스를 벗어났지만 그 뒤를 따르던 3위 이하의 모든 선수들은 2위인 앞 사람만 보고 따라가다가 자신들도 모르게 코스를 벗어났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과 똑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 사람이 소리 높여 ‘이 길이 옳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 길이 옳은지 아닌지도 분별하지 않고 따라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자신이 가는 길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길인지 아니면 사람을 따르는 길인지도 분별하지 않고 너무도 쉽게 진리의 길에서 벗어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나면서 소경이었던 사람에 대하여 당시의 보편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죄인으로 치부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합당한 제자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본문 앞 쪽의 8:34절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무거나 따라가면 안 됩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의 이야기는 시기적으로는 ‘변화산 사건’과 ‘말 못하는 아이를 치유하신 사건’ 후 갈릴리를 지나 가버나움으로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제자들은 돌아오는 길에 서로가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논쟁을 벌였고, 예수님은 진정으로 큰 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서로 자신이 높다고 다투었던 제자들은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요한이 예수님께 마치 자랑하듯이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즉시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고 하시면서 요한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서 있었던 이 대화의 내용은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생각하고 따라야 할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장에서 적용되어야 하는 실질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에는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주는 본문말씀에서 중요한 두 가지만 보려합니다. 본문말씀은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18:1-10절에 천국에서 큰 자에 대한 이야기와 실족하게 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었는데 본문의 내용은 빠져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9:49-50절에 본문내용 중에 다른 사람의 신앙도 존중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고, 17:1-2절에 실족하게 하는 일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마태복음에서 빠진 ‘다른 사람의 신앙도 존중해야 한다.’는 내용을 중간에 넣어서 ‘누가 크냐?’는 교훈과 ‘실족하게 하는 일’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신앙의 실천에 있어서 그 대상과 방법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본문에서 강조된 우리 그리스도인이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 두 가지를 살펴보려합니다.

 

※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신앙도 존중해야 합니다.

 

본문 38-40절을 봅시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이 말씀에서 요한의 말을 생각해보면 대단히 이기적인 생각이라고 여겨집니다. 마치 귀신을 내쫓는 능력이 예수님 제자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말합니다. 사실 사람들에게는 어린아이 때부터 소유욕과 함께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이를 프라이버시(privacy)라고 해서 자신의 사생활을 침해당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이런 욕망이 확대되면 이기적인 집단을 이루게 됩니다. 교회에서 파벌이 형성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이런 프라이버시가 있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소속되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꼽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귀신을 내쫓는 행위가 마치 자신들의 특허인 것처럼 그들에게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이기적 신앙의 표본입니다.

 

예전에 경남 진해지역의 어느 중형교회 교회당 가까운 지역에 작은 교회가 들어섰습니다. 바로 옆이 아니라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이었고 교단도 달랐습니다. 어느 날, 중형교회의 담임목사님이 그 개척교회 목사님을 찾아와서 ‘이 구역은 자신의 구역이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강압적으로 내쫓았다고 했습니다. 꼭 무슨 조폭들이나 갱단의 영역 다툼 같은 이야기 같습니다. 왜 이렇게 복음사역과 주님의 일에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오늘에 있어서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교회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마치 자신들의 소유인 것처럼 말하는 것을 봅니다. 세상에 교회는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한 지체로서의 하나인 교회입니다. 에베소서 1:22-23절입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는 결코 인간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능력도 어느 개인이나 교회의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4:11-12절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성령께서 공급하시는 은사와 능력은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인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11절입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것이니라.” 앞부분인 4-10절까지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에 대하여 열거하고 이 모든 일을 성령께서 행하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다른 지체들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중요하게 여기시듯이 다른 지체들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당연히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 그리스도인은 작은 것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본문 41-42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이 말씀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나뉩니다. 즉 물 한 그릇 대접하는 것과 비천한 한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 이 둘 다 모두 대단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조차 두지 않을 정도로 작은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작은 두 가지 일로 생명과 죽음, 상급과 벌이 나누어진다고 하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사람에게 인정받거나 위대한 일에는 앞 다투어 하려고 하지만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것에는 마음조차 두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도 이런 생각을 하신다면 큰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하시면서 겨자씨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13:31-32절입니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그리고 누가복음 16:10-12절에서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고 하십니다.

 

영국의 ‘니콜라이의 날’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영국 런던 캔터베리 대성당에 ‘니콜라이’라는 집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인 17세부터 성당의 사찰 집사가 되어 평생을 성당 청소와 심부름을 했습니다. 그는 자기 일이 허드렛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맡은 일에는 최선을 다해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그가 하는 일 중에는 시간에 맞춰 종탑의 종을 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종을 얼마나 정확하게 쳤던지 런던 시민들이 니콜라이의 종소리에 자기 시계를 맞추었다고 합니다. 그 영향력은 자녀들에게도 미쳐서 그의 두 아들 성실한 노력으로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가 76세 노환으로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에도 종탑으로 올라갔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종을 쳤고 결국 종탑 아래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니콜라이의 사명감과 헌신에 감동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영국 황실의 묘지에 그를 안장해 주었고, 그의 가족들을 귀족으로 대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상가와 시민들은 그날 하루는 일하지 않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고, 결국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이 공휴일로 되었습니다.

 

도대체 종치는 일이 무엇이 그리 소중하다고 생명처럼 여기고 충성했을까요? 스가랴 4:10절입니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그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이 말씀은 남 유다가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기 시작한 스룹바벨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아무 것도 없이 저 나약한 스룹바벨이 어떻게 성전을 재건하겠느냐?’고 탄식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비록 미약하게 시작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스룹베벨의 손이 그 일을 마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이렇게 작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생명을 다하여 최선을 다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더 많은 일을 맡겨주십니다. 혹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무시하고 대충하거나 거부한다면 자신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주어진 자리에서 큰 것 작은 것 따지지 말고 맡겨주시는 일에 성실과 진정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더 나은 미래가 열리게 됩니다. 만일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무시하거나 실족하게 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됩니다. 마태복음 18:10절입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처럼 작은 사람을 무시한 일이 그의 천사를 통하여 항상 하나님께 보고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중요하듯이 다른 사람도 중요합니다. 비록 내 생각과 다르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는 이해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그리고 작은 일 하나, 보잘 것 없어 무시해도 괜찮을 한 사람도 무시하거나 실족하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일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들을 관심 있게 살펴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신실하고 충성된 삶을 이루어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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