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지금 역사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믿는가?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4,288회 작성일 2018-06-14 22:51

*** 지금 역사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믿는가? / 마가복음 6:45-52

 

  마가복음 6:45-52,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의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9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50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51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 들어가는 말

 

요즘 사람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기도 하는 것이며,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건강,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암 공포’가 단연 으뜸인데, 암 공포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람들까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건강에 관한 주제는 각 TV방송 채널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장수 프로그램이기도 합니다. 요즘 시니어들의 유행어가 9988이랍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르거나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의미인데, 목숨의 길고 짧음은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사람의 생명이 하늘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하실까요? 신명기 32:39절입니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 없도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이 말씀을 믿지만 자신의 현실 생활 속에서는 거의 잊고 살아갈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현실적인 불신의 벽은 ‘지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고 확신합니까? 오늘은 이 현실적인 믿음에 대하여 살펴보려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너무도 익히 알고 있는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이적입니다. 이 이적은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각 복음서마다 강조점이 조금씩 다릅니다. 마태복음 14:22-33절에는 ‘물위로 뛰어내린 베드로를 등장시켜서 베드로의 의심을 통한 믿음을 강조’합니다. 마가복음 본문에는 ‘제자들의 깨닫지 못하는 마음으로 말미암는 불신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6:16-20절에는 간략하게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으신 사건 자체만을 기록해서 앞의 오병이어이 이적과 다음에 나오는 생명의 떡에 대한 가르침의 중간 교량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세 복음서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하여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북쪽의 벳새다 성읍이 있는 충적평야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장정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긴 이적사건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였던 무리를 보내는 동안 제자들에게 먼저 호수 건너편으로 가도록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한 틈을 타서 홀로 산으로 기도하러 가겼습니다. 한편 어둠이 깔린 갈릴리 호수를 작은 배로 노 저어 가던 제자들은 바람이 거칠어지면서 파도가 높아져서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제자들이 어려움에 빠진 모습을 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아시고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노 젖는 배를 지나쳐 가시려고 하셨습니다. 어두운 호수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그렇잖아도 파도로 고심하는데 유령까지 나타났다고 혼비백산 하여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돌이키시며 배로 다가오셨고 제자들에게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이 모든 사실에 놀라서 어안이 벙벙해 있는 제자들의 상태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즉 제자들의 현실적인 믿음의 부재(不在)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믿음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며 사실이라고 믿지만, 지금 자신에게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히브리서 4: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못함이라.” 이 말씀은 ‘말씀을 들은 그리스도인이 그 말씀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사실이라고 믿고 또한 이 말씀이 지금 자신에게서도 이루어진다고 믿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에 대하여 마가복음 11:23-24절에 기록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현실적인 삶을 동일시하는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전에 잘 아는 권사님과 이야기 하던 중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남편과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에 권사님이 마태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인용하면서 “당신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지 않느냐?”고 하니까 남편이 “당연히 믿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권사님이 “그러면 왜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느냐?”고 했는데 그 대답이 걸작입니다.

“아니, 성경말씀을 믿는 것 하고 지금 이 시대하고는 다르지.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세상에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지키는 사람이 어디 있어?”

 

여러분도 이런 생각이십니까? 성경말씀이 기록된 시기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분명히 다릅니다. 시대뿐만 아니라 나라도, 민족도, 환경도, 역사도 모두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이적이나 가르침이나 모두 믿지만 지금 우리 시대에는 그대로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믿음은 무능하고 무익한 믿음입니다. 즉 앞서 보았던 히브리서 4:2절 말씀처럼 이런 믿음으로는 아무것도 하나님께 구할 수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염려컨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믿는 사람들 중에 절대다수가 이런 무익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본문말씀 당시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런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가 강조하고자 했던 내용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본문 52절입니다.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이 기록에 있는 “떡을 떼시던 일”이 언제 있었습니까? 제자들에게 기억이 가물거리도록 오래 전의 일입니까? 아니요. 불과 한 두 시간 전의 일이었습니다. 이 이적은 예수님께서 말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말한 것도 아닙니다. 제자들 자신이 직접 그 이적에 관여했었습니다. 분명히 작은 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가 든 작은 도시락 하나로 만 여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직접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과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바람이 즉시 그친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현실적인 믿음의 부재’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이론적인 믿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 어떻게 현실적인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까?

 

마가복음 본문에서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부분을 기록했습니다. 본문 48절입니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의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예수님은 새벽 3-4시 경에 그 어둠 속에서 호수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이 사실은 모든 기록에 공통적입니다. 그 다음 기록인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시려고 하시매”라는 말씀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왜 이 말씀을 넣었을까요? 이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해 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관심이 없었다거나 제자들의 고통을 외면하시려는 표현이 결코 아닙니다. 제자들의 관심을 유도하신 것입니다. 왜냐고요? 제자들의 부르짖음과 간구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려는 듯이 보이자 제자들이 소리 질렀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없지만 두려움 속에서 제자들은 주님의 도움을 구했을 것입니다. 그 부르짖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은 부르짖는 제자들에게 ‘그래 바로 나야, 안심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말씀은 믿지만 그 말씀이 지금 나에게도 능력으로 이루어진다고는 믿지를 못합니다.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이런 현실적인 믿음의 부재를 해결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부르짖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주님께 부르짖고 간구한 사람들입니다. 본문 바로 다음에 나오는 7:26절의 수로보니게 여인의 경우를 봅시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2절도 봅시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마가복음 10:46-48절을 봅시다.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메오의 아들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이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현실이 힘들고 답답하지만 믿음도 없고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을 때에는 부르짖고 간구하십시오.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령이라고 도와달라고 부르짖을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있는 배로 돌이키셨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주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모르시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생활이 힘들고 환경이나 여건이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괴롭게 노를 젓듯이 기도할 힘도 없게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러한 때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관심은 여전히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고난을 지나치지 않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잊히지도 않고 취소되지도 않습니다. 다만 우리 자신이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마치 하나님이 나를 떠나신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9:1-2절을 봅시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현대어 성경 /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팔이 짧아서 너희를 구원하지 못하시며 귀가 어두워서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너희의 호소를 듣지 못하신다고 생각하느냐? 오히려 너희의 죄악이 너희를 하나님과 갈라놓았다. 너희의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에 장벽처럼 쌓여 있기 때문에 너희가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들으실 수가 없다. 너희의 온갖 악행이 쌓여서 하나님의 얼굴을 가려 놓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희의 비참한 모습을 바라보실 수가 없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무엇이 가려집니까? 본문말씀에서는 그 이유를 “마음이 둔하여졌다.”고 했습니다. 왜 제자들의 마음이 둔하여졌습니까? 누가복음 21:34절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또한 이처럼 깨닫지 못하는 마음을 마태복음 13:22절에서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라고 표현합니다. 즉 마음이 둔하여지는 것은 세상적인 염려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눈앞에 벌어진 위기의 상황에 온 마음을 빼앗겼던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표현한 대로 베드로가 물속으로 빠져 들게 된 이유도 눈앞에 보이는 현실적인 위기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힘들고 어렵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께 간구하고 부르짖으십시오. 주님은 결코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외면하거나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묵묵하게 삶에서 실천하십시오. 그리하여 매일의 삶이 능력의 주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는 행복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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