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제3의 눈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4,395회 작성일 2018-03-19 16:47

*** 제3의 눈 / 왕하 6:14-17, 요 4:34-35

 

열왕기하 6:14-17, “14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그들이 밤에 가서 그 성읍을 에워쌌더라. 15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하니 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그들과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요한복음 4:34-35,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 들어가는 말

 

요즘 시대가 어지럽다보니 물리적인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좀 더 진실한 세상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나 봅니다. 지금 이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제3의 눈’에 대한 것입니다. 제3의 눈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이론은 이렇습니다. ㅁ제3의 눈이란 ‘모든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어떤 상상이든 구체화시키고 현실화 시킨다.’는 내면의 눈입니다. 인간의 눈은 본질적 관점에서 눈이 아니라, 물리적 현상의 관찰 도구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눈은 사물의 본질은 보지 못하고 현상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3의 눈이 진짜 눈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감각에 의존하는 사람은 결코 제3의 눈을 활용하는 사람을 넘어설 수 없다.’고 합니다. 감각은 정신을 낮은 차원에 구속하지만 제3의 눈은 감각의 영역을 초월해 있기에 정신을 자유하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ㅁ어려운 설명을 하고 있지만 보편적으로 제3의 눈은 물리적인 시각을 벗어난 영적인 시각을 의미합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제3의 눈을 알아볼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제3의 눈은 ‘영안(靈眼)’ 즉 영적인 세계를 보고 느낄 수 있는 안목을 말합니다. 이 영안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구약 성경 모두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구약과 신약 두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제3의 눈인 영안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 본문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구약본문인 열왕기하 6장의 내용은 엘리사 선지자 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북 이스라엘에서 사역했던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이 시대의 북 이스라엘 왕은 9대 여호람 왕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아람 군대가 자주 이스라엘을 침범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아람 군대가 침범하는 곳에는 번번이 이스라엘 군대가 미리 와서 경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람 왕 벤하닷은 자기들 중에 이스라엘과 내통하는 자가 있다며 고민했습니다. 그러자 신하 중의 한 사람이 ‘내통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엘리사 선지자가 왕이 침실에서 말하는 것까지도 알고 이스라엘 왕에게 말해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벤하닷은 엘리사가 있는 도단 성을 공격하기로 하고 밤중에 성읍을 포위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난 엘리사의 사환이 아람군대가 온 성읍을 포위한 것을 보고 혼비백산하여 엘리사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 선지자는 너무도 태연하게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두려워하는 사환을 위하여 하나님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사환은 즉시 새로운 세계를 보았습니다. 불 말과 불 병거들이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르고 있는 영의 세계를 본 것입니다.

 

신약본문인 요한복음 4장의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마리아는 예루살렘 북쪽 56Km지점에 위치한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수가는 사마리아 한 가운데의 성읍으로 ‘야곱의 우물’이 있는 ‘세겜’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를 떠나서 갈릴리 지역으로 가시다가 지름길인 사마리아를 지나시다가 수가 성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 수가 성의 입구에 있는 야곱의 우물 가에서 예수님 일행이 잠시 쉬면서 음식을 먹고자 했습니다. 제자들은 음식을 구하러 마을로 갔고, 그 사이에 예수님은 물을 길러 나온 여인을 만났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일을 말하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깨닫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전했습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음식을 구하여 돌아와서 예수님께 음식을 권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음식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으시고, 멀리 마을에서 몰려나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하십니다. ㅠ이 두 본문의 이야기에서 공통된 중요한 주제는 ‘영안’입니다. 엘리사의 사환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육신의 눈으로 본 현상이나 세상적인 이치를 말했지만, 엘리사 선지자나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세계를 보시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시대에도 이와 같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육신적인 안목과 세상적인 이치로 울고 웃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영의 눈과 영적인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ㅠ※ 우리가 가져야 하는 제3의 눈은 무엇입니까?

 

앞에서 설명했던 제3의 눈은 우리가 가져야 하는 영안이라고 했습니다. 이 영안은 보편적으로 영적으로 보는 것뿐만 아니라 영의 세계를 깨닫는 안목을 포함합니다. 쉽게 말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거나 깨닫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8:17-18절입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을 때에 제자들이 ‘지금 우리에게 떡이 한 개밖에 없다.’고 걱정하는 것을 듣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조금 전에 작은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떡이 없다고 걱정했던 것입니다. 신약본문에서 제자들은 이제 막 씨를 뿌린 들판을 보면서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하겠군.’이라고 했으며, 엘리사의 사환은 아람 군대를 보면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이는 모두 영적 안목의 부재로 인한 현상입니다.

 

한편 스데반 집사가 순교할 때에 스데반을 돌로 치던 유대인들과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스데반 집사가 유대교를 어지럽히는 이단세력’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귀를 막고 악마처럼 달려들어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러나 돌에 맞아 죽어가던 스데반 집사는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7:54-57절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한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육신의 눈만으로 보며, 세상의 이치에 잠겨 있게 되면 영의 세계는 전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스데반 집사는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으며, 엘리사도 역시 영안이 열려 하늘 군대를 보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도 영적인 안목으로 수가성에서 몰려나오는 사람들을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영안(靈眼)입니다.

 

영적인 안목으로써 우리의 생활에서 가장 잘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두 번째 전도여행을 계획하고 아시아 방향으로 출발했을 때의 일입니다. 성령께서 바울 전도단의 전도여행 길을 막으셨습니다. 사도행전 16:6-10절을 봅시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바울 전도단은 세 번에 걸쳐 아시아 방향으로 가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갈 수 없는 상황에 빠졌습니다. 그 상황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인지를 모르지만 사도 바울은 그 현상을 ‘성령께서 막으셨다.’고 깨달았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시도를 할 때에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아시아 방향과는 정반대 방향인 유럽 쪽으로 돌리신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길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게 된 상황을 ‘성령께서 막으셨다.’고 깨달았다는 것이 영적인 안목입니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일들을 수없이 마주하게 됩니다. 학교를 진학하기 위하여, 직장을 얻기 위하여, 결혼을 위하여, 하다못해 친구나 가족과 여행을 가거나, 몸이 아파서 병원으로 가는 일에서까지 이런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저 자신도 가장 최근에는 제 아들이 아파서 병원을 선택해야 했을 때에 이런 문제에 직면했고 하나님의 책망을 깨달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님의 제자라고 믿기도 하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도, 깨닫게 하시는 감각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10:3-5절을 봅시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님께 속한 양들은 당연히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압니다. 이것이 영안이며 영적인 안목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활 속에서 주님의 음성도, 주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감각도 없이 자신의 생각대로 산다면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영안이나 영적인 안목이 없이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전에도 드린 말씀이지만 되새김 해보시기 바랍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만들어 그곳에 두셨습니다. 하지만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계약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하여 온 인류에 죄가 전가되는 원죄를 불러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와 영적인 단절을 선언하시고 에덴동산에서 내 보내셨습니다. 그 이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바사르(육체, flesh)’라고 부르셨습니다. 영이 없는 짐승과 똑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수 천 년이 지나서 하나님은 인류의 원죄를 끊으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속죄제물로 보내셨습니다. 그 보내신 곳이 ‘떡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베들레헴’에, 짐승들의 집인 마구간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탄생하신 예수님의 어린 육체는 짐승들의 밥통인 ‘구유’에 뉘어졌습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서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51절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그리고 53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결별되어 죽었던 영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즉 속죄 제물로 말미암아 새롭게 살아난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 6:65)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때부터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떠난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영적 안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에 대한 말씀은 영적인 안목이 아니고는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중에서 육신적인 안목만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난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시대에는 이런 현상이 더 크게 일어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가까워 질 때에 일어날 징조들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사탄과 마귀의 권세들은 온갖 거짓과 불법의 일들로 교회를 무너뜨리려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24절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자지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지금 우리나라는 큰 영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세력들은 온 세계를 동성애, 동성결혼, 우상숭배(교황숭배) 이런 것들로 이미 교회를 초토화시켰습니다. 선민인 이스라엘마저 무신론자들이 65%를 이루고, 이스라엘 인구의 1/3이 사는 사실상의 수도나 다름없는 ‘텔 아비브(TEL AVIV)’는 동성애의 천국이 되어 있습니다. 이제 사탄의 세력들은 마지막 남은 대한민국의 교회를 무너뜨리고 국가를 무너뜨리려고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성소수자를 내세워 교회를 유린하고, 문화를 장악하여 사탄숭배로 사람의 정신을 무력화 시킵니다. 이제는 좌파세력으로 국가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려 합니다.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를 정확하게 분별하고 사탄의 세력들과 싸우기 위하여 영안이 열려야 하며 영적인 안목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 즉 사탄의 세력은 기도와 금식 외에 다른 것으로 제어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29절입니다. (한글킹제임스역본)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것으로도 내보낼 수 없느니라.’고 하시더라.” 우리는 지금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 깨어있음은 곧 ‘영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 영적인 안목으로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신실하고 충성된 하나님의 자녀이자 주님의 군사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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