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믿음은 실상입니다(히11:1-6).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888회 작성일 2001-10-20 22:57
Title 믿음은 실상입니다. / Scripture 히11:1-6 / Space 대복교회

***들어가는 말

미션스쿨인 모 고등학교에서의 일입니다. 교목이 학생들에게 채플(학교예배)에 출석할 것을 열심히 권고하는데 한 학생이 도무지 응하지를 않습니다. 답답해진 교목은 그 학생을 불러 사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군은 왜 그렇게 예배출석을 거부하는가?” 학생이 대답하기를, “목사님, 저는 기독교가 어떤 것인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예배에도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제법 당연한 논리입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목사님이 제안을 했습니다. “학생! 지금 군이 한 말을 거꾸로 한번 해볼 수 없겠나?” 잠시 머뭇거리던 그 학생이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습니다. “예배에도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은 학생을 향하여, “바로 그걸세. 이제 예배에 참석하게나.”라고 권면 했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모두 참 진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삶이 가장 옳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경우를 ‘교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은 《믿음》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특히 적극적 사고방식의 주창자들, 신유를 행하는 사람들, 슈퍼 세일즈맨 유형의 사람들, 정치가들, 심리학자들, 설교자들 등 자칭 훌륭한 사람들은 모두 믿음에 대하여 좋은 말을 합니다. 마치 ‘믿음’이 자신들의 소유인양 외칩니다. “내 말을 믿기만 하라. 그러면 승리할 것이다. 믿음을 가지기만 하라.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들의 말대로 한다면 ‘믿음’이 만사형통케 하는 신비의 사상쯤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유형들은 믿음 그 자체가 어떤 신비한 힘이 있어서 자신이 바라는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충분히 믿기만 한다면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그 꿈을 실현시켜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 믿음의 대상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합니다. 즉 믿음의 대상이 너무 적절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에 대하여 애매모호하게 어떤 잘못된 신념을 믿는 믿음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무엇인가?’ 또는 믿음이 어떤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올바른 믿음에 대하여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믿음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봅시다.

본문에서는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태복음8:5-10절의 내용을 봅시다. 가버나움의 한 백부장이 중풍 병으로 고생하는 자신의 하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간청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바로 이 백부장의 믿음이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즉 백부장은 시공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던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의 실상은 능력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런 믿음은 지금 세대에도 찾아보기가 힘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믿을만한 다른 보조 수단을 찾습니다. 즉 안수하거나, 기름을 붓거나, 적어도 가까이 가서 기도라도 해 주신다면 병이 더 쉽게 치유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사람들의 자기신념입니다. 사람들이 우상에게 비는 것도 이와 같은 자기신념의 산물입니다.
믿음은 결코 사람의 신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당연히 하나님께서 믿음의 대상이 되십니다. 백부장은 바로 이 믿음의 원리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자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한 마디가 시공을 초월함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분명히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유익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진리에 근거를 둔 믿음이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믿음의 대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사람 각자의 신념과 세상적인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버스를 타거나 운전을 하거나 걷는 것이나 심지어 음식을 먹을 때에도 신념이나 믿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만일 내가 탈 버스가 사고가 날 것이라고 의심을 한다면 아마 타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음식에 독을 넣었을 것이라고 의심이 된다면 먹지 않겠지요. 세상의 모든 일에는 나름대로의 신념과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그 대상이 세상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그 대상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호주에서 사역하던 선교사가 어떤 일을 계획하면서 2000만원 정도의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일주일동안 편지 50여 통을 쓰고 국제전화도 하고 온갖 궁리를 다해서 계산해 보았지만 삼백만원 정도 밖에 나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물론 기도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없어서 그 계획을 취소하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갔습니다. 그러다보니 초조감과 좌절감 패배의식 같은 것으로 영적 저기압 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그의 부인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시나요?” 선교사가 “그렇다.”고 했더니,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것도 확신하시는지요?” 이 물음에 ‘너는 정말 나를 믿느냐?’라고 번개처럼 스치는 주님의 책망이 있었습니다. 선교사는 사실 하나님 보다 그 많은 후원자들을 믿었던 자신을 회개하고 다시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선교사처럼 잘못된 대상을 향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의 차이는 믿음의 대상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앞서 잠간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병자들이 치유 받는 과정을 보면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고백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9:23절에서,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러 온 사람을 향하여,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의 ‘믿는 자’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기도가 응답이 없다고 여겨진다면 내 믿음의 대상이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고 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 믿음은 곧 생활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장식품이나 생활을 좀더 윤기 있게 해 주는 윤활유나 자신의 소원을 위해 필요한 요술방망이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 그 자체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바라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셨는데, ‘실상’과 ‘증거’는 현존하는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본문 2-5절, 그리고 11장 전체가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이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고, 그 믿음의 분량이 큰 것이라 할지라도 실생활에서 활용되지 못하는 추상적인 것이라면 그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생활 속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믿음의 중요성에 대하여 일반적인 말씀만 하시는데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생활 속에서 믿음으로 체험할 수 있는 엄청난 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기초가 되는 믿음으로 인한 복이 ‘영적 생명’입니다. 곧 요한복음5: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약속이 그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 생명’은 ‘더욱 풍성한 삶’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10:10절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마가복음11:22,23절에서는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를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삶에서 나타나는 능력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실한 믿음의 실상입니다.
문제는 두려움과 의심, 세상적인 믿음과 신념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 마음에 쌓여있으면 우리의 생활이 혼란스럽게 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과 영적인 가치관이 섞여서 생활을 혼란스럽게 하고 삶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어느 신앙인의 인생 시나리오입니다.
나는 무릎 꿇고 바쁘게 기도했습니다. 나는 할 말이 너무 많았습니다. 바쁘게 서둘러야 했고, 일터로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성급한 기도를 하고 무릎을 펴고 일어났습니다. 나의 신앙적 의무는 행해졌고, 이것만으로도 나의 영혼은 편안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나는 찬양의 말을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친구에게는 그들이 나를 비웃을까 두려워 예수님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다. 할 일이 너무 많다.’ 그것이 나의 끊임없는 변명이었습니다. 궁핍한 자에게 온정을 베풀 시간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갔을 때, 나는 눈을 감고 서 있었습니다. 주님은 손에 책을 들고 계셨는데, 그 책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책을 찾아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너의 이름이 없구나. 한 때 너의 이름을 적으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었다.”그리고 끝이었습니다.

여러분 바쁘시더라도 잠간 멈추어 서서 자신의 믿음을 돌아봅시다. 타이어가 펑크 난 채로 더디고 불편하게 다니는 것보다 잠깐 지체하더라도 새 타이어로 고치고 달리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머뭇거림도, 세상적인 바쁨도, 변명과 게으름도 원망과 시비도 인생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영원한 영의 생명을 위해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을 정비하고 후회를 남기지 않는 기쁨의 삶으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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